미안해.
함부로 나서서 조언 하지 않는 것이
내가 아끼는 이들에 대한 배려라 생각했다.
조언과 위로는 다르다는 것도,
위로가 뭔지도 몰라 할 줄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그땐 몰랐다.
병문안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한손은 핸들을 잡은 채 운전 하는 내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과장님, 혜영언니 입원했어"
전화기 너머 서림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한다.
큰 일엔 대범하면서도 오히려 작고 섬세한 일에 휘청 거리는 그녀였다. 특히나 예절이나 규범 같은 것에 민감하여, 그렇지 않은 친구들을 보면 말은 직접 못하면서도 혼자 열받아 하곤 했다.
"워워해, 너랑 상관없는 일에 스트레스 받지마"
그럴때마다 별거 아니란 식으로 다독였지만, 그녀에겐 늘 아닌건 아닌거였다.
사내엔 꽤나 예쁘장한 외모로 남자직원들의 시선을 받는 직원이 하나 있었다.
외모가 눈에 띄는 경우, 성격이나 태도가 폄하되는 경우는 흔하다.
딱히, 드러나게 지적할 만한 잘못이 없는데도, 불편한 질타를 감수 해야 하는 상황, 나는 직원들 내에 오히려 그런 분위기가 생기는 것을 경계했다.
하지만 혜영의 눈엔 명확한 잘못이 보였던 듯 하다.
"쟤는 맨날 꼬리쳐서 용서받고 , 오늘도 봐요 한시간 늦게 온대요. 외근 일찍 나가도 아예 바로 퇴근이에요."
"아 그래?"
사실, 다른 팀 직원까진 관심이 없다보니 심드렁하니 대꾸한다.
"과장님, 저건 맨날 저래요 일주일에 한두번씩"
"너랑 상관있어?.."
"규칙을 어기는 거잖아요. 지키는 사람들 바보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난 너가 신경쓰면서 속상해하니까. 그게 싫어"
"못참겠어요. 싫어 죽겠어요."
끄덕끄덕..
그렇게 받아들 일 수도 있겠구나. 했을 뿐이다.
스트레스만으로도 꽤 심각한 병명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진.
혼자 생각하며 끄덕거리다가 병실 문을 여니, 창가쪽 침대 한켠에 혜영이 반갑게 손을 든다.
나는 금새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허락도 없이 왜 아파"
"헤헤 과장님. 보고싶었어요"
물색없이 웃는다.
세상 모두가 나를 싫어해도 난 과장님 편. 이라 해줄 것 같은 너.
"병원에선 뭐래"
그녀가 좋아하는 붕어빵 한봉투를 옆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직 몰라요, 이것저것 검사해봐야 안대요. 그냥.. 스트레스 때문일거라던데요"
"그놈의 스트레스. 넌 너무 예민해. 내가 그러니까 제발 맘 좀 편하게 먹으라고 그렇게 말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냉장고를 뒤져 본다.
그러자 그녀는 창가에 있던 도너츠 박스를 내민다.
"이거 드세요, 아까 엄마 친구분이 사다주신거, 냉장고에 음료수도 있고, 다 드세요"
"응, 말안해도 다 먹어."
침대 맞은 편에 앉아 도넛 하나를 입에 문다.
"나도 과장님 처럼 무던한 사람이면 좋았을 텐데, 난 그런 사람으로 태어나질 않았나봐요."
"그게 뭔소리야. 그냥 너가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거지."
"과장님 말이 다 맞다고..나도 들을 땐 생각하는데, 그게 몸으로 받아 들여지는건 아니더라고요."
태어난 기질.
방향을 알게되도, 깨닫는다 해도, 기질 때문에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전엔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나에겐 쉬어도, 누군가에겐 어려울 수 있고, 누군가에겐 쉬어도, 나는 죽어도 안되는 것도 있다.
각자가 소화할 수 있는 영역이 애초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도넛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혜영의 눈 안을 쳐다본다.
득도한 사람의 눈빛은 이런걸까. 평온하게 미소짓는 그녀의 눈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 하다.
"나는 그런데, 과장님이 걱정돼요."
"야, 니 몸이나 챙기면서"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본다.
"과장님은 맨날, 다 괜찮아, 다 지나가 , 이러면서 힘들다고 말로 안하잖아요."
"진짜 안힘드니까"
사실이었다.
너희들한테 말할정도로 힘든 적은 없었다.
늘 칼퇴인걸-
"강한 척 하는 것도 한계가 있을텐데, 나중에 한번에 아프면 어떡해요. 나도 아파보니까 그렇더라고요."
"..."
"다 별일 아닌게 아니고, 모든게 별일 인데. 애 쓰고 있는 걸 몰랐던 것 같아요."
불현듯 있는지도 몰랐던 가슴 속 상처에 누군가 후시딘을 바르는 것 같다.
"너 여기서 책만 읽어? 철학책 봐?"
내가 너를 문안 온건데, 왜 너가 나를 문안해.
심장이 뛰면서 창피한 기분이 든다.
넌 나보다 한참 어리잖아.
내가 말하면 늘 네, 네 동조만 하고 자기 생각도 다 말 안하고.
연애도 못해봤잖아. 친구도 많이 없다며.
그런데 왜.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사람이 깊어.
왜 내가 너 앞에 벌가벗겨 진 것 같은데.
"과장님 더 먹을래요?"
도넛 박스를 다시 들이민다.
'야, 내가 먹으러 왔냐?"
"ㅋㅋㅋ네, 빨리 사무실 가서 봐요, 간식도 서랍에 많이 챙겨놨는데."
박스 안 도넛을 다시 골라본다.
고개를 들지 않고 얘기한다.
-간지러운 얘기니까.
"꼭 빨리와. 난 너 없으면 안돼. 심심해서."
"그러니까. 밥먹을때 심심하죠?"
끄덕이다가 갑자기 나도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미안해"
"응? 과장님이 왜요? "
"미안해 혜영아."
입술을 말며 고개만 끄덕였다.
미안해.
몰라서.
모른 척 해서.
방관해서.
할 줄을 몰랐어서.
-그런데 이제 나도 . 할 수 있을 것 같아.
.
그렇게 간, 나의 어린스승에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