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 워라벨은 의미가 없다.

휩쓸리지 말고 주도적으로 살자.

by 코와

몇 년 전부터 정치권과 언론을 중심으로 '워라밸(Work-Life Balance)'이라는 말이 화두가 되었습니다. 한국인의 노동 시간이 유럽 등 선진국에 비해 너무 길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반드시 삶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죠.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가 워라밸을 '6시 정시 퇴근'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로만 뇌리에 강렬하게 심어버렸다는 점입니다.


9 to 6, 누가 정한 규칙입니까?

한 번쯤 궁금해하신 적 없나요? 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에 퇴근해야 하고, 그 시간 이후에는 일하면 안 되는 걸까요? 사람마다 삶의 방식은 다릅니다. 누군가는 3일 밤을 새워 일하고 나머지 4일을 몰아서 놀고 싶을 수도 있고, 체력이 좋은 20대에는 하루 16시간씩 일해서 빨리 돈을 벌고 40대에 은퇴해 소일거리나 하며 살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워라밸 담론은 우리 삶을 지나치게 '하루 단위'의 틀에만 가둬버린 것은 아닐까요?

학생들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조금 더 수월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하려는 노력을 우리는 비난하지 않습니다. 만약 지금의 '하루 단위 워라밸' 논리대로라면, 고등학생들에게도 '스라밸(Study-Life Balance)'을 강요하며 "밤샘 공부는 건강에 해로우니 금지"라거나 "저녁 6시 이후 학원 수강 금지" 같은 법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이전 글들에서 늘 '사고를 확장하자'고 말씀드린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누군가의 넛지(Nudge), 심하게 말하면 사회적인 가스라이팅에 휩쓸려 내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지 못하는 상황을 경계해야 합니다.


인생은 '삼여(三餘)'가 있어야 한다

물론 밤새워 일한다고 무조건 성공하는 것은 아니고, 정시 퇴근을 한다고 노년이 빈곤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생의 단계마다 쏟아야 할 에너지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초등학교 때 기초를 놓치면 중학교 때 고생하고, 그때를 놓치면 고등학교, 대학교, 나아가 사회생활까지 힘들어지는 구조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합니다. 밤새워 공부하는 고등학생은 훌륭하고, 첫 직장에서 밤새워 일하며 배우는 청년은 '요령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면 어딘가 모순 아닐까요? (물론 쓸데없는 의전이나 똥군기로 밤을 새우는 문화는 저 역시 단호히 반대합니다.)

원래 고사성어 '삼여(三餘)'는 중국 위나라 학자 동우가 말한 '독서하기 좋은 세 가지 여유(겨울, 밤, 비 올 때)'를 뜻합니다. 하지만 저는 예전에 어느 스님의 강연에서 들은, 인생에 빗댄 해석이 더 가슴에 와닿더군요.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인생은 삼여가 있어야 한다. 하루는 저녁이 여유로워야 하고, 일 년은 겨울이 여유로워야 하며, 인생은 노년이 여유로워야 한다." 이 이야기를 잘 곱씹어 보면 순서가 보입니다. 인생의 노년이 여유로우려면 한 해의 곡식을 갈무리하는 겨울이 여유로워야 하고, 겨울을 넉넉하게 보내려면 매일의 노동을 마친 저녁에 충분한 휴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걸 반대로 해석하면 어떨까요? 젊은 날 워라밸을 외치며 6시 '땡' 하면 퇴근해서 즐기기만 하느라 정작 회사에서는 실력을 못 쌓고, 그로 인해 일 년의 성과(고과)를 망치고, 결국 인생의 겨울인 노년까지 망가지는 삶. 스님의 말씀은 워라밸이라는 미명 하에 우리가 진짜 챙겨야 할 '인생의 밸런스'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경계하라는 교훈으로 들립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이드 스텝'은 도태입니다

요즘 MZ세대, 혹은 젠지(Gen Z) 세대 중에는 승진(Step-up)보다는 책임이 적은 자리에서 머무는 '사이드 스텝(Side-step)'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팀장이 되어봤자 월급은 별로 안 오르는데 아래 직원들 관리하는 부담만 는다"는 이유에서죠.인생 선배로서 뼈 있는 한마디를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누가 팀장은 시켜 준답니까?" 팀장이 될 능력을 갖춘 상태에서 주체적인 선택으로 승진을 안 하는 것과, 아무도 시켜줄 마음이 없는데 "난 승진 안 해"라고 말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실력 없이 워라밸만 외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도피일 수 있습니다.


텅 빈 괌행 비행기가 보여주는 경고

최근 괌으로 가는 비행기에 승객이 거의 없어 혼자 이코노미석을 전세 낸 것처럼 이용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괌은 2019년 약 16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았지만, 최근에는 그 절반 수준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면세점(DFS)마저 철수한다는 소식이 들릴 정도로 코로나 이후 회복이 가장 더딘 관광지 중 하나입니다. 왜 그럴까요? 냉정하게 보면 괌은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남들도 다 만들 수 있는 평범한 리조트, 낡은 놀이기구와 쇼핑몰로 버티고 있었던 것이죠. 시설은 노후화되는데 물가는 오르고 매력은 떨어지니, 관광객들에게 외면받고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대학교 때 배운 지식만 가지고 평생을 우려먹으며,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고 공부하지 않은 채 '라이프 밸런스'만 추구하는 삶. 그 끝은 경쟁력을 잃은 낡은 휴양지처럼 쓸쓸할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워라밸은 '칼퇴'가 아니라, 내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실력'에서 나옵니다. 하루살이 워라밸의 달콤함에 취해, 훗날 맞이할 긴 노년을 위태롭게 만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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