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백이라는 오만
이 작품은 실제 사건들을 참고해 만들어졌지만, 인물과 장소, 사건의 구체적인 전개는 모두 허구입니다. 현실의 특정 인물이나 사건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내용의 현실감을 위해 변호사의 감수를 받으며 집필하고 있습니다.
작품에는 성범죄 및 폭력적인 장면, 성인 대상의 묘사가 포함될 수 있으니 이용에 참고해 주세요.
오후 4시의 나른한 햇살이 로펌 사무실 블라인드 사이로 길게 늘어졌다.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소송 기록들을 넘기던 변호사, 상길의 미간이 좁혀졌다. 형사사건 변호사로 일한 지 10년. 이 바닥에서 일하며 깨달은 건, 세상에는 억울한 가해자도 많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건 뻔뻔한 위선자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때, 정적을 깨고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은 ‘민석 형수’. 상길의 고등학교 선배이자, 건실한 중소기업 대표인 민석의 아내였다.
"여보세요? 형수님, 오랜만입니다."
"상길 씨! 어떡해... 우리 그이, 민석 씨가 잡혀갔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울음이 섞여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상길은 반사적으로 쥐고 있던 볼펜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진정하세요. 잡혀가다니요? 경찰서, 아니면 검찰청입니까?" "아니, 오늘 재판 선고가 있다고는 했는데... 변호사도 없이 그냥 벌금이나 나오겠지 하고 갔거든요. 근데 방금 구치소라고 연락이 왔어요. 구속됐다고..."
상길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재판 선고 기일에 피고인이 바로 구속되었다는 건, '법정구속'을 의미했다. 실형이 선고되었다는 뜻이다.
"형수님, 설마 형... 변호사 선임 안 했습니까?" "안 했어요. 자기는 절대 죽어도 그런 적 없다고. CCTV는 없어도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고. 괜히 변호사 쓰면 죄 인정하는 꼴이라고 국선 변호사만 믿고..."
상길은 마른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삼켰다. '이 멍청한 형아. 성범죄 재판에서 무기 하나 없이 맨몸으로 덤비는 게 얼마나 미친 짓인데.'
서울남부구치소 변호인 접견실. 묵직한 철문이 닫히는 굉음과 함께,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상길이 자리에 앉자 맞은편 문이 열리고 교도관의 감시 하에 민석이 들어왔다. 황토색 수의 가슴팍에 박힌 노란색 수인 번호가 그가 지금 특별 관리가 필요한 성범죄자 신분임을 잔인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접견실 책상 위에는 투명한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완벽히 차단된 것은 아니었다. 양옆과 아래쪽은 서류를 주고받거나 소통할 수 있도록 틔어 있었다. 상길은 그 틈으로 민석에게 사건 서류 몇 장을 밀어 넣었다.
"상길아..."
민석이 가림막 틈으로 손을 뻗어 상길의 옷소매를 붙잡으려다 멈칫했다.
"나 진짜 아니야. 나 억울해 미치겠다. 내가... 내가 강간 미수라니..."
"형, 시간 없으니까 감정 빼고 팩트만 말해. 1심에서 징역형 떨어지고 법정구속된 거야. 판사는 피해자 진술이 일관되고 신빙성 있다고 판단한 거고."
상길은 냉정하게 말을 끊었다. 민석은 떨리는 손으로 상길이 건넨 서류를 매만졌다.
"그래... 알았다. 그날, 사건 당일은..."
민석의 디자인 회사에는 최근 최지윤 과장과 박현수 대리 사이의 알력 다툼이 있었다. 사건 일주일 전 회의에서 민석은 현수 대리의 시안을 채택하며 지윤 과장의 자존심을 꺾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사건 당일 오후, 지윤 과장은 면담을 요청하며 대표실로 들어왔다. 민석은 PC로 클라이언트와 대화하느라 그녀를 책상 앞 회의 테이블에 앉혀두고 책상을 지키고 있었다. 사실 대화를 피하고 싶기도 했다. 최대한 진정시키고 이야기하기에는 혼자 있는 것도 하나의 방범임을 잘 안다. 업무를 마치고 이야기를 나누려 다가간 순간, 지윤 과장은 돌변했다.
찌이익-!
그녀는 스스로 검정 스커트 옆단을 찢고 하얀 블라우스 단추를 뜯어냈다. 살구색 속살과 흰색 브래지어가 드러나는 충격적인 상황 속에, 그녀는 비명 대신 입을 틀어막고 흐느끼며 복도로 뛰쳐나갔다. 넋이 나간 민석의 등 뒤로 직원들의 수군거림이 쏟아졌다.
"그게 다야... 난 손끝 하나 안 댔어!..."
상길은 굳게 다문 입술로 선배를 응시했다. 이건 철저하게 계획된, 덫이었다
감수 : 경찰간부 출신 마성의 변호 김판수 변호사 (youtube.com/@policelawyer_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