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증편향
이 작품은 실제 사건들을 참고해 만들어졌지만, 인물과 장소, 사건의 구체적인 전개는 모두 허구입니다. 현실의 특정 인물이나 사건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내용의 현실감을 위해 변호사의 감수를 받으며 집필하고 있습니다.
작품에는 성범죄 및 폭력적인 장면, 성인 대상의 묘사가 포함될 수 있으니 이용에 참고해 주세요.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항소장을 제출한 뒤, 항소를 준비하는 동안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형사사건의 항소심은 기록 검토와 배당에만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구치소의 차가운 바닥에서 보낸 그 두 달은 피의자 민석에게는 뼈를 깎는 고통이었고, 변호사 상길에게는 안갯속에서 길을 찾는 고충의 시간이었다.
구치소 접견을 몇 번 마치고 로펌으로 돌아온 어느 날 상길을 맞이한 건 현장 조사를 마친 박 사무장이었다. 그는 서울 한복판 서운경찰서 형사과에서 이름을 날리던 베테랑 수사관 출신이었다. 몇 년 전, 수사 처리 과정에서의 억울한 징계로 수사 경과를 박탈당한 뒤 여성청소년과 에서 성범죄 수사를 전담하다 상길의 팀에 합류한 인물이다.
“강 변호사님, 상황이 아주 고약합니다. 단순히 입을 맞춘 수준이 아니에요. 이건 거의 사이비 종교에 가깝습니다.”
박 사무장이 낡은 수첩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상길은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박 사무장에게 늘 정중했다.
“사무장님, 고생 많으셨어요. 직원들 분위기가 어떻길래 그렇습니까?”
“우선 사무실 구조부터가 문제입니다. 1층 입구와 2층 대표실로 이어지는 계단 앞까지 전부 보안 업체 자동문이 설치되어 있더군요. 지문이나 카드를 찍어야만 열리는 구조입니다. 진술은 더 가관입니다. 지윤 과장뿐만 아니라 다른 여직원들도 나오더군요.”
박 사무장이 수첩을 넘기며 구체적인 진술들을 읊기 시작했다.
“한 직원은 대표님이 커피를 마시라고 권하면서 은근슬쩍 가슴 쪽 팔뚝을 잡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직원은 여직원이 짧은 치마를 입고 2층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대표님이 뒤에서 빤히 다리를 훑어보는 걸 봤다고 증언했어요. 심지어 지윤 과장이 대표실에 들어갈 때면 ‘오늘은 또 어떤 음흉한 시선을 견뎌야 할까’라며 동료들에게 불안감을 호소했다는 정황까지 나왔습니다. 있지도 않은 일을 마치 본 것처럼 말하는 느낌이 사무실 전체를 지배하고 있어요.”
박 사무장은 현장에서 찍어온 사진을 내밀었다. 2층 자동문 바로 뒤쪽에 설치된 CCTV였다.
“이 CCTV가 원수입니다. 복도 상황만 찍히고 정작 대표실 안쪽은 완벽한 사각지대예요. 지윤 과장이 옷이 찢긴 채 흐느끼며 나가는 장면은 찍혔겠지만, 그 안에서 스스로 옷을 찢었는지 아닌지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영상만 보면 영락없이 덮치려다 실패한 그림이죠.”
마침내 열린 서울고등법원 2심 첫 공판 기일. 법정의 공기는 무거웠다. 항소심 첫 재판은 양측의 입장 확인으로 시작되었지만, 검찰의 공격은 초반부터 매서웠다.
“재판장님, 본 사건이 발생한 장소는 폐쇄적 구조입니다. 피고인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고립시켰습니다.”
상길이 즉각 반박했다.
“검사님, 2층은 벽면 일부가 유리로 되어 있고 복도에 다른 직원들이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위력에 의한 범죄가 일어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상식이라니요! 변호인은 지금 가해자의 시각에서만 논하고 있습니다!”
검사가 목소리를 높이며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대법원 판례(2018도 16055)에 따르면, 성범죄 사건을 심리할 때는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피해자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과 가해자와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피해자는 인사권자인 피고인에게 완전히 제압된 상태였습니다. 자, 사진을 보십시오. 피해자의 가슴골 사이에 선명하게 긁힌 붉은 상흔입니다. 피고인의 강압적인 행위 없이는 결코 생길 수 없는 상처입니다.”
스크린에 피가 비치는 선명한 상처 사진이 띄워지자 방청석의 지윤은 어깨를 가늘게 떨며 흐느꼈다. 상길은 검사의 논리에 허점을 찾아야 했다.
“재판장님, 피해자의 상처는 자해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오히려 사건 직후 피고인의 평온했던 업무를 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보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피고인의 파렴치함을 증명하는 겁니다! 범행 직후에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PC 앞에 앉아 있었다는 것 자체가 피해자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증거 아닙니까?”
검사의 궤변에 가까운 공격에 재판부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민석은 피고인석에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저 여자 말 다 거짓말이에요! 저는 손끝 하나 안 댔단 말입니다!”
“피고인, 정숙하세요!”
재판장이 법대를 두드리며 경고했다. 상길은 민석의 팔을 꽉 잡으며 진정시켰지만, 법정의 분위기는 이미 거대한 피고 유죄라는 공기에 갇혀 있었다. 직원들의 악의적인 진술과 연출된 상처, 그리고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견고한 법리의 벽 앞에서 상길의 변론은 힘없이 흩어졌다.
재판장이 다음 기일을 잡으며 공판을 마쳤다. 구치소로 돌아가는 호송차에 오르기 전, 민석이 상길의 손을 붙잡았다.
“상길아... 나 진짜 아니야... 재들이 왜 나한테 저러는지 모르겠어... 지윤이가, 지윤이가 나를 죽이려고 작정한 거야...”
민석의 비명에 가까운 절규가 길게 메아리치는 거처럼 귀에 박혔다. 상길은 멀어져 가는 호송차의 뒷모습을 보며 차가운 법원 청사 벽에 기대섰다. 모든 정황과 법리가 민석을 옥죄고 있었다. 이 거대하고 정교한 덫 앞에서, 상길은 깊은 한숨과 함께 어두워지는 하늘만을 말없이 응시했다.
감수 : 경찰간부 출신 마성의 변호
김판수 변호사 (youtube.com/@policelawyer_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