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위
이 작품은 실제 사건들을 참고해 만들어졌지만, 인물과 장소, 사건의 구체적인 전개는 모두 허구입니다. 현실의 특정 인물이나 사건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내용의 현실감을 위해 변호사의 감수를 받으며 집필하고 있습니다. 작품에는 성범죄 및 폭력적인 장면, 성인 대상의 묘사가 포함될 수 있으니 이용에 참고해 주세요.
서울남부구치소의 접견실 공기는 여전히 무겁고 축축했다. 투명한 가림막 너머로 마주 앉은 조민석의 얼굴은 두 달 전보다 훨씬 수척해졌지만, 눈빛만은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민석은 자리에 앉자마자 상길이 밀어 넣은 서류를 쳐내듯 밀어버리며 쏘아붙였다.
"야, 강상길. 너 지금 장난해? 내 와이프가 너한테 착수금으로 천 오백만 원이나 줬다며. 근데 결과가 뭐야? 두 달째 나는 여기서 썩고 있고, 재판은 저번 기일 보니까 아주 가관이더만. 그 돈 받고 이 정도 일밖에 못 해?"
민석의 갑작스러운 짜증에 상길은 서류를 챙기며 차갑게 대꾸했다.
"형님, 진정하세요. 지금 형님은 성범죄 실형 선고받고 들어온 피의자예요."
"아니라고 했잖아! 내가 안 했다는데 왜 너까지 이 모양이야! 돈 받았으면 밥값을 하라고!"
민석이 소리를 지르자 교도관이 주의를 주었다. 상길은 민석을 빤히 응시하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형님, 착각하지 마세요. 형의 진실을 경찰, 검찰이 알아서 밝혀줄 거 같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요즘 성범죄는 여자 주장만 일관되면 일단 기소하고 보는 세상이에요. 영화처럼 검경이 진실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나 또한 변호사로서 형을 돕는 거지, 형의 결백을 신처럼 믿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나마 선배니까 내가 이 정도로 매달리는 겁니다. 지금 형이 해야 할 건 짜증 내는 게 아니라, 아주 세세하고 쓸데없는 기억이라도 다 끄집어내서 나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뭘 더 알려줘? 난 고객사랑 업무 일정 조정하다가, 미친년이 옷 찢고 나가는 거 본 게 다라고! 지가 옷 찢고 나가서 내가 그년 젖이라도 본 게 죄라면 죄겠다!"
상길의 서늘한 현실 자각에 민석은 힘이 빠진 듯 자리에 주저앉아 낮게 신음했다.
그날 저녁, 휴대폰이 울렸다. 민석의 대학 친구와 선배들이었다. 재판이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은 그들이 상길을 위로한답시고 단골 로바다야끼로 불러낸 것이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사케 병들이 비워질 때마다 민석을 둘러싼 설전은 더 거칠어졌다.
"솔직히 상길아, 민석이가 그럴 애냐? 걔는 대학 때 여자애들이 고백해도 일일이 정중하게 거절하던 놈이야. 펜스 룰의 시조새 같은 놈 아니냐?"
"맞아. 사고 칠 놈이면 진작 쳤겠지. 근데 그년이 미쳤다고 제 옷까지 찢어가며 구치소까지 보내겠냐? 요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민석이가 뭔가 빌미를 줬으니까 저 사달이 난 거겠지."
"그 직원도 인생 걸고 나온 걸 텐데 아무 근거 없이 저러겠어? 사무실 분위기가 음침했다는 직원들 말도 다 이유가 있으니까 나오는 거지. 너무 민석이 편만 들지 마라."
옹호와 비난이 팽팽하게 맞서던 중, 구석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던 민석의 친구이자 민석의 소개로 알게 된 오 선배가 입을 열었다.
"다들 민석이 겉모습만 보고 떠드네. 그 자식이 어떤 놈인데. 걔는 돈의 노예야. 시간 단위가 아니라 초 단위로 일하는 놈이라고. 거래처랑 메일 하나 보낼 때도 오타 하나 용납 안 하는 놈이 무슨 강간을 해? 그 시간에 견적서 하나 더 뽑을 놈이지. 그 새끼한테는 입금 확인이 섹스보다 중요해."
상길의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초 단위’, ‘기록’. 상길은 그 길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운명의 최종 공판일. 증인석에 앉은 최지윤은 눈물을 쏟으며 엄벌을 호소했다.
"재판장님, 저 파렴치한을 엄벌에 처해 주세요... 제 삶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SNS에서는 저더러 꽃뱀이라고 그러고 회사도 못 다니고 있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성추행을 참아온 게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습니다."
상길은 피고인석에서 증인석에 앉은 피해자에게 물었다.
"어려우시겠지만 그날의 일을 다시 한번 차분하게, 어디서 어떻게 당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지윤은 코를 훌쩍이며 대답했다.
"저는 대표님 방 회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대표님이 다가와서 '그때 현수 대리 편 든 건 내 맘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저를 좋아한다고 했어요. 그러더니 제 허리를 두르고 한 손으로는 블라우스 단추를 풀려고 했습니다. 너무 놀라 하지 말라고 소리 지르며 팔을 뿌리치려다 블라우스가 다 찢겼고, 대표님은 더 거칠게 키스를 하려고 하면서 저를 몰아붙이고 치마를 찢으며 팬티 속에 손을 넣으려고 했습니다."
검사는 기다렸다는 듯 스크린에 사진을 띄웠다. 지윤의 가슴골 사이에 선명하게 긁힌 붉은 상처 자국, 그리고 가슴이 다 보이는데 대충 여미고 2층에서 나와 1층으로 뛰어 나가는 CCTV 캡처 화면이었다.
"보십시오. 저항하는 피해자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생긴 가혹한 흔적과 증거들입니다."
상길이 차분하게 일어났다.
"재판장님, 사건 직후 출동한 경찰의 바디캠 영상을 봐주십시오. 당시 피고인은 결백을 주장하며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습니다. 여기 확대 화면을 보면 피고인의 손톱은 바짝 깎여 있습니다. 살점이 파일 정도의 깊은 상처를 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상길은 이어 국과수 감정서를 제시했다.
"또한 검찰은 피고인이 피해자를 격렬하게 제압하며 추행했다고 주장하지만, 국과수 감정 결과 피고인의 손톱 밑과 입술 등 그 어떤 곳에서도 피해자의 DNA나 블라우스의 미세 섬유 조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는 옷이 두 벌이나 찢기고 몸에 상처가 날 정도의 몸싸움이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피고인의 몸과 손은 지나치게 깨끗합니다. 즉, 저 상처는 피해자가 미리 준비한 자해의 흔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더불어 피해자의 몸에서도 어떠한 피의자의 DNA가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사무장이 조심스레 법정 문을 열고 들어오며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 OK 사인을 하며 상길에게 서류 봉투를 건넸다. 상길은 내용을 확인한 뒤 법정 경위를 통해 재판부로 서류를 전달했고, 곧 큰 화면에 자료가 띄워졌다.
"결정적으로 이 '시간'을 보십시오. 피고인의 PC 로그 기록 및 카카오톡 본사로부터 회신받은 채팅 기록입니다. 피고인은 사건 발생 직전까지 고객과 납품 기일에 대해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피고인이 마지막 메시지인 [네, 이사님. 시안은 내일까지 수정해서 보내겠습니다. 00 부분은...]을 전송한 시각은 오후 3시 58분 10초입니다. 그리고 피해자가 2층 자동문을 열고 뛰쳐나간 보안회사의 개폐 기록 및 로그 기록은 3시 58분 20초, 복도 CCTV에 포착된 시각은 22초입니다."
상길이 영상 하나를 더 전달했다.
"제가 직접 대표이사 방 책상에서 2층 문까지 뛰어보니 성인 남성 기준으로 약 7초가 걸렸습니다. 피해자의 진술에 의하면 피고인이 책상에서 일어나 피해자에게 다가가 허리를 안고, 치마 속에 손을 넣고, 블라우스를 찢고, 키스를 하려고 하며 다시 치마까지 찢는 이 모든 행위를 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3초 이내여야 합니다. 3초. 이 짧은 시간에 책상에서 일어나 피해자를 제압하고, 옷을 두 벌이나 찢고, 가슴에 상처를 남겼다고요? 그러고 나서 자신의 옷매무새까지 다듬었다? 검찰의 주장은 신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최지윤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리기 시작했다. 결심일 재판장은 안경을 고쳐 쓰고 기록을 꼼꼼히 살핀 뒤, 법봉을 잡았다.
결심일 재판장은 안경을 고쳐 쓰고 기록을 꼼꼼히 살핀 뒤, 법봉을 잡았다."판결을 선고하겠습니다."
재판장의 음성이 법정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본 사건의 핵심은 피해자의 진술이 과연 객관적인 물리적 사실과 부합하느냐는 점에 있습니다.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의 진술은 유력한 증거가 되나, 그것이 물적 증거 및 과학적 기록과 정면으로 배치될 때는 그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제출된 디지털 로그 기록에 따르면 피고인이 업무용 메시지를 전송한 시점부터 피해자가 2층을 나선 시각 사이의 간격은 단 10초에 불과합니다."
재판장이 조민석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상식적인 견지에서 볼 때도, 물리적으로도 피해자가 주장하는 강제추행 및 폭행의 전 과정이 이 짧은 시간 내에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극히 어렵습니다. 또한 피고인의 신체 상태와 DNA 감정 결과 역시 피해자의 진술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피고인 조민석에 대한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때에 해당하므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피고인 조민석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탕, 탕, 탕.
법봉 소리와 함께 조민석은 피고인석에서 무너지듯 오열했다. 상길은 법정을 나오며 싸늘하게 식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최지윤을 응시했다.
"사무장님, 바로 최지윤 씨에 대한 무고죄 고소장 접수해 주세요. 이제 우리가 받은 만큼 돌려줄 차례입니다."
상길은 일부로 재판장을 나가며 큰 소리로 말했다. 진실은 화려한 변설이 아니라, 0.1초의 차이로 기록된 숫자에 숨어 있었다. 순백의 덫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다.
감수 : 경찰간부 출신 마성의 변호 김판수 변호사 (youtube.com/@policelawyer_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