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정
보통의 드로잉은 자그맣다.
흔히 수첩의 한편에 간직되어 있다가 작품에 쏘인 휘향 찬란한 조명의 일부를 나누어갖는 형태를 지닌다. 형형하거나 눈을 현혹하는 작업을 위한 계단의 첫 층일 뿐이다. 이러한 형태의 경중은 없지만, 보통의 전시 형태가 뻔하다. 그도 당연한 것이 요즘의 관객들은 그런 화려한 것을 원한다. SNS에 업로드할 사진 구석에 비칠 그림이 자신을 빛내기를- 또는 자신의 교양을 대표할 그림들을 찾아낸다. 그런 것에 단편의 드로잉들이 나열됨은 다소 단조롭다. 간혹 드로잉 전시라고 하는 것은, 미끼 상품이 함께하는 전시일 경우가 많다.
반면 드로잉은 비교적 자유롭다. 전시 공간 속 설치되는 모든 것에 드러나는 압박과는 달리 유일하게 틀을 벗고 앉아있다. 그러므로 정답이 없다. 재료의 정답, 형태의 정답, 이야기의 정답. 예술의 정답이 없다지만 이것은 실없는 소리다. 다양한 형태로 작가들을 조여 오는 규칙들이 있다. 이 속에서 백현진(1972~)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담담함안담담함 라운지》에서, 그가 꿈꿀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모양으로 담백하게 조립한 물질들은 나열된다. 전시의 출발지점엔 작은 드로잉들이 관객을 반긴다. 값싸고, 익숙하고, 넓은 작업 공간이 필요 없는 재료, 제도용 0.3mm 샤프로 채워 넣은 드로잉북은 ‘현실적인 한계를 핑계 삼지 않는’, ‘맞고 틀리고 가 없는 그림’의 묶음(1)이 바로 벽면에 붙어있다. 문의 경계를 넘어서면 좁은 시야를 만들어내는 전시장을 마주한다. 좁은 공간에 붙어있는 비닐들은 선의 파편으로 검은 벽에 박힌다. 불완전한 형태는 이뿐만이 아니다. 곧 나아가 넓은 공간을 마주할 때 바닷가의 조약돌처럼, 가을날 구멍 뚫린 낙엽처럼 정돈되지 않은 모양의 드로잉이 벽을 가득 매운다.
그의 작업은 한계가 없다. 단지 형태와 규격에 한정되지 않으며 매체와 이야기도 정해짐이 없다. 드로잉은 무엇인가. 조형요소를 한없이 제한하거나, 수없는 혼합체로 전시장에 내던질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양극단에 서있으며 자신을 하나의 이름으로 포괄할 수 있는 이불속 발끝과 정수리의 묶음과도 같다. 백현진은 이것을 맛있게 조리한다. 그는 언젠가 단순한 반복노동에 매달리거나, 추상적 개념의 재진술과 기호화 - 서문에 따르면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언어로 번역될 수밖에 없는 지각의 성질을 마치 그물에 걸린 재료처럼 거두어들인다(2). 그러한 재료는 마치 들꽃들처럼 하염없이 무질서하게 놓이고 정리되기를 반복한다. 전시장 한편에 놓인 식물과 화분은 정리되지 않던 옷가지처럼 널브러져 있다. 그 사이 반짝이는 그물과 양철 걸상, 작은 의자가 정감을 낸다. 그 앞엔 벽에 아른거리는 폭포가 자연을 흉내 내듯 엉성히 거친 소리로 전시장을 가득 채운다.
어떠한 것에 이름을 지어주는 것. 그 형태와 성질을 정의하는 것. 때로는 이러한 행위가 그것을 제한한다. 쿠키틀이 반죽을 잘라내는 것은 처음엔 플랫한 반죽에 개성을 새기는 듯하다. 그러나 공장처럼 찍어낸 개념은 한계를 생성한다. 백현진은 이름을 붙였다. 민들레 홀씨처럼 말속에서, 글 속에서 유영하던 어떠한 것을 붙잡아낸다. 이름을 붙인 것을 박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로 굴려 보낸다. 방생된 맥락은 점층 되어 공간을 메우고 또는 흘러간다. 관람자는 발을 내딛을 때 솜털을 간지럽히던 바람을 맞던 것처럼 그 흐름을 마주한다. 맑게 고인 연못은 그 속내의 것을 그대로 비춘다. 때로는 싱거움이 자극 속에서 쉬어가는 곳이 된다. 자유로움이 생성한 담담함. 그리고 담담함 안의 담담함. 혹은 안 담담함. 그 텁텁하거나 귀여운 발음으로부터 자유롭고 가벼이. 백현진의 작업으로부터 관람자는 그전까지 써오던 안경을 내려놓을 것이다. 그것의 먼지를 닦아내거나, 알을 안경테와 이별시키거나 - 무엇이든 무겁지 않게.
(1),(2) : 《담담함안담담함 라운지》 전시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