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했으며, 엄마와는 동거를 했다.
첫 번째 아내와는 자그만 양장점을 같이 하며 아들 하나를 낳아 키웠다. 양장점을 열었지만 잘 되는 형편은 아니었다. 아이를 낳으니 가족의 생계가 걱정되었던 아빠는 몸도 제대로 풀지 않은 아내와 물애기('젖먹이'의 제주방언)를 두고 월남전에 참전했다. 월남전에 참전하면 많은 봉급 준다는 선전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병사를 모으기 위한 상술 같은 선전이었다. 상사나 장교처럼 높은 직급이라면 모를까 일반병사의 월급은 한국에서 월급쟁이만도 못한 봉급이었고, 미군 일반병사의 처우보다 3분의 1도 되지 않는 임금이었다.
하지만 그 선전에 속아 아빠를 비롯해 처자식을 두고 멀리 다른 나라, 그것도 전쟁터로 돈을 벌기 위해 참전한 가난한 아버지들이 참 많았다. 일반월급쟁이 보다 못한 월급을 받기 위해 처자식과 눈물로 이별하며 멀리 이방나라, 총알이 쉴 새 없이 지나가고 사람이 죽어가는 전쟁터로 날아간 것이 아니었을텐데 말이다. 그전까지 아빠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한다. 억울했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당장이라도 날아가서 처자식을 볼 수 없는 설움을 위로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빠는 월남전에 가서부터 술을 마시고 담배를 배웠다.
아빠가 월남전에 가서 해야하는 일은 주로 건설과 관련된 일이었다. 아빠는 공병이었다. 강 위로 길을 내야하는 때도 있었고, 우물을 파고 만들어 병사들에게 물을 조달해야하는 상황도 있었다. 전쟁을 하기 위해 필요한 공사는 모두 해야했다. 총기를 가지고 직접적으로 싸우는 병사는 아니었지만 총알이 오고 가는 전쟁 한복판에서 물길을 만들고 다리를 만들었다. 일이 고되어 피곤한 날들이 많았지만 멀리 두고 온 아내와 아들 생각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도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빠는 가난에서 벗어나서 건실한 가정을 만들고 싶었다.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을 만들고 싶었다. 일찍이 고아가 되어 가족의 품을 만들고 싶었던 아빠. 드디어 사랑하는 아내를 얻었고, 어여쁜 아이를 낳았다. 하늘아래에 부모도 없고, 의지가 되는 친척도 없는 아빠에게 아내와 아들은 세상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보물이었을 것이다. 자신보다도 소중한 존재말이다. 부모의 품이라는 것을 내 아이에게만은 만들어주어야지, 남편의 편안한 보호를 내 아내에게만은 만들어주어야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어렵고 힘들었던 시간들을 이러한 생각들로 버티며 월남전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큰돈을 벌고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졌던 탓일까. 아니면 홀로 물애기를 힘겹게 키우며 지내왔던 탓일까. 월남전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따뜻하고 넉넉한 마음씨던 아내는 아빠가 월남전에서 돌아와 다시 재회를 했을 때 굉장히 차갑고 냉소적으로 변해있었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자기탓인 것만 같아 미안했던 아빠는 양장점 일뿐 아니라, 주변에 일꾼이 필요하다고 하면 가서 허드렛일을 해주며 돈을 벌어다 주었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는 형편과 변하지 않는 아내의 태도에 화가 나 싸우기를 여러 번, 결국 서울에 있는 고모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돈을 좀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다. 하지만 아내는 그러면 그럴수록 돈을 더 모으고자 혈안이 되었고, 아빠는 지쳐갔다. 마침내 또 한 번의 큰 부부싸움 끝에 아내는 집을 나갔다. 아빠는 1년 반정도 혼자서 아이를 키웠다. 아내를 찾으러 수시로 돌아다녔지만 모두 모른다고 하거나 행방을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다시 돌아온 아내는 아빠에게 이혼을 해달라고 했다. 설득을 해도 아내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결국 아빠는 첫 번째 아내와 이혼을 했다.
아빠의 첫 번째 아들, 그러니 그는 나의 배다른 큰오빠이다. 나와 큰오빠와는 열다섯 살 정도 나이차이가 났다. 큰오빠는 일찍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의 엄마를 따라나가 살고 있었다. 아빠의 첫 번째 아내인 그의 엄마는 큰오빠가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데리고 갔다. 그녀의 간절한 애원, 그리고 큰오빠 역시도 엄마와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아빠는 큰아들을 자주 만날 수 있는 조건으로 그의 엄마에게 보냈다. 큰오빠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지만 두 가지 정도 생각나는 그의 모습이 있다.
하나는 내가 일곱 살 즈음의 기억인데, 큰오빠는 오랜만에 집에 놀러와 건너편 방에서 작은오빠와 함께 잠을 자고 있었다. 한밤중에 나는 자다가 그만 이불에 실례를 했다. 엄마의 불같은 성격에 혼이 날까 무서워 몰래 거실 마루에 나와 울고 있었다. 내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는지 큰오빠는 나와서 내게 괜찮다 달래주고는 옷을 갈아입혀 주고 오줌에 젖은 이불과 옷가지를 조용히 그 밤에 빨아 널어주었다. 이 좋은 기억 하나 덕분에 큰오빠는 작은 오빠와는 다르게 자상하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다른 기억 하나는 조금 슬픈 기억인데, 어느 날 아침부터 아빠가 술을 진탕 마시고서는 큰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쌍x아 너는 아방신디는 전화도 안 하고 오지도 않나(너는 아빠한테는 전화도 안 하고 오지도 않냐). 어멍이영만 살아 새x(엄마와만 살아라)"
오빠는 그날 저녁에 한걸음에 달려왔다. 아빠는 엄마에게 저녁을 차리라고 하고서 작은오빠에게 술심부름을 시켰다. 아침부터 퍼마신 술로도 모자라 또 술심부름이었다. 아빠는 술이 깰 틈도 없이 연이어 부어 마시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혀와 입은 배배 꼬여 본인이 하는 이야기 대부분을 우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야기는 반복적이었고, 두서없었으며, 자신의 속마음과는 다르게 내뱉었고, 형편없었다.
"개xx 느같은 것이 자식이라? 느가 자식이라? 나가 널 어떵 키워신디...(너같은 것도 자식이냐. 너가 자식이 맞냐.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너는 느네 어멍만 불쌍허냐. 앞으로 오지도 말고 연을 이 자리에서 끊엉 살자. 너는 느네 어멍이영만 살아.(너는 너네 엄마만 불쌍하냐. 앞으로 오지도 말고 연을 이 자리에서 끊고 살자. 너는 너네 엄마와만 살아라)"
아빠는 이 같은 말을 거짓말 보태어 서른번은 족히 반복했다. 아빠가 술에 만취되어 푹하고 쓰러지기 전까지 큰오빠는 무릎을 꿇고 아빠의 곁에서 이런저런 술주정을 모두 들어주어야 했다. 오빠는 아빠가 푹 쓰러져 잠든 후에 울엄마에게 "아줌마, 저는 앞으로 다신 안 올 거예요."라고 말한 뒤에 집을 떠났다. 나는 오빠에게 어떤 말도 걸 수가 없었다. 오빠의 눈시울은 빨개져 있었다. 나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오빠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오빠는 그날부터 아빠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물론 나도 큰오빠의 얼굴을 본 것이 그날이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