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머니볼> (2011)/베넷 밀러
“who are you?”
나는 이 물음에 뭐라 대답해야 하나. 이름을 말하면 ‘빵형’(브래드 피트)이 “네 이름 따윈 개똥만큼도 관심 없어”라 할 테니 재미없겠지만 들어봐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멀쩡히 초중고를 다니고 대학은 공부를 안 해서 성적 맞춰 들어갔다. 자동차를 좋아해 스무 살이 되자마자 자동차를 샀고 자동차공학을 전공했고 자동차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다 자동차 독립잡지를 만들었다 군대는 뒤늦게 갔다. 운전병으로. 내 20대 초반과 중반 초입엔 늘 자동차가 있었다. 자동차 구입 말고 자동차 여행을 갈 수도, 자동차공학 말고 다른 전공을 택할 수도, 멀쩡히 졸업해 멀쩡히 취업할 수도, 때에 맞게 군대에 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거나 못했다. 자기연민에 빠지는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나는 늘 혼자 내 갈 길을 갔다. 나름의 성과를 거둔 덕에 어린 나이에 대표님, 편집장님 호칭을 들을 수 있었지만 반대급부로 혼자 감당하는 법을 빠르게 터득해야 했다. 좋아하던 자동차도 조금은 싫어졌다. 밖에서 보면 용감한 도전이었을지 몰라도 안에 있던 시간에 나는 꽤 오랫동안, 자주 외롭고 무서웠다. 가끔은 엄마를 잃어버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다. 그럴 때마다 찾는 책이 있고 노래가 있고 드라마가 있고 영화가 있다. 오늘은 그중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머니볼>이다. 잘생긴 주인공 ‘빵형’ 빌리 빈(브래드 피트) 이야기부터 늘어놔보자. 내 이야기보단 재미있을 거다. 그가 단장으로 있는 오클랜드 애슬래틱스의 겨울은 예상대로 춥다. 만년 꼴찌보다 서러울지 모를 가난한 구단이기 때문인데, 특히나 이번 겨울엔 그나마 있던 주력 선수들 마저 몽땅 이적했다. 단장으로서 빈은 묘책을 구안한다. 아니 구인한다. 좌완 구원투수를 트레이드하러 간 클리블랜드서 웬 예일대 경제학과 출신 프런트 직원을. 구인된 작자 이름은 피터 브랜드. 구인된 이유는 남다른 야구 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그 철학이 빈이 찾던 묘책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론과 시스템은 다음과 같다. 모든 건 데이터(숫자)에 근거하고 그 데이터는 브랜드가 수집. 빈이 결정한다. 둘은 고정관념. 그러니까 정석을 추구하는 원로 스카우터, 감독, 구단주, 언론과 싸우며 이기고 지고를 반복한다. 숱한 싸움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을 고수한다.
비범한 행보라 마음까지 비범한 건 아니다. 그들은, 특히 빈은 ‘확신’을 갈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이론이 틀림없길 바라는 간절한 확신 말이다. 그런데 확신이라는 게 뭔가. 결론으로 도출되기 전까진 확신할 수 없는 게 확신 아닌가. 빈도 그걸 안다. 그때마다 후회되는 과거를 떠올리며 고독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갈 뿐이다. 뿐만이랴 책임져야 할 현재도 있다. 짤리지 않아야 40대 고졸 실직자가 되지 않고, 하나 있는 딸에 우등 교육을 선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관계에서 여유로운 표정과 대사를 잃지 않는 그지만 솔직해지는 공간. 이를테면 자동차, 이를테면 텅 빈 경기장에 있을 때면 공황장애라도 걸릴 거 같은 표정이다. 그는 분명 외롭고 무섭다.
그가 솔직해지는 지점을 눈치챘다면 <머니볼>은 그때부터 다른 영화가 된다. 단순한 야구영화에서 도전하는 이의 고단함을 다룬 영화로. 오클랜드의 우승 장면을 기대하다 빈이 위로받는 장면을 기대하는 영화로.
영화의 후반부는 이를 눈치챈 이들에 선물 같은 장면 두 개를 투하한다.
첫째로 빈과 브랜드다. 둘의 관계는 단순히 찰떡궁합 비즈니스 파트너 혹은 영감의 원천 따위로 치부하기엔 너무 가볍고 아깝다. 둘은 같은 목표를 그린다는 점만으로 서로가 한 시즌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데, 당신도 알겠지만 이건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일이다. 둘의 복선에 화룡점정을 찍는 장면이다. 상처받기 쉬어 기대하지 않는다는 빈은 팀이 아메리칸 리그 최다연승 기록을 세우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음에도 디비전 시리즈서 탈락하자 좌절에 빠져있다. 동시에 부자 구단 보스턴으로부터 거액의 단장직 제의가 오는데, 이 기분 좋은 일은 빈에 혼란을 가중시킨다. 고뇌하고 자책하고 갈등하는 그에 브랜드는 비디오 하나를 재생한다. 오클랜드 산하 마이너리그 팀의 거구 포수다. 그는 2루로 뛰는 걸 무서워한다. 강속구를 받아쳐 중앙 깊숙이 날린다. 장타성 타구에 2루로 향하지만 그는 2루가 무섭다. 기어코 넘어져 1루로 슬라이딩하여 복귀한다. 그러자 모두가 비웃는다. 그가 친 타구가 펜스를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건 야구덕후 브랜드가 야구덕후 빈에 건넬 수 있는 최대치의 위로로 보인다. 당신은 홈런을 친 것이라는 비유에 빈의 눈가가 잠시 촉촉해진다. 브랜드. 역시 문과다.
둘째로는 딸이다. 딸은 영화 중간중간 ‘조상님이 꿈에 나왔어요‘와 같은 빈도로 등장하는데, 그래서 나는 빈이 위로받는 데 브래드가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딸은 딸이다. 마지막 씬이다. 빈은 그가 솔직해지는 공간. 자동차 안에서 운전 중이다. 오클랜드냐 보스턴이냐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그가 무심히 CD를 재생한다. 딸이 녹음한 CD다. 짤막한 멘트를 뒤로 노래가 재생된다. 딸이 부르는 노래는 <The Show>. 감미로운 멜로디와 상반되게 빈의 눈가는 촉촉하다 못해 축축해진다. 모든 가사가 명문이지만 ‘just injoy the show(그냥 쇼를 즐겨요)’라는 가사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그 단순한 구절에 나는 시종일관 속수무책으로 무장해제된다. 사실 이 구절에 당도하기 위해 2시간을 버텨온 거다. 아무것도 몰라야 할 어린 딸내미가 부르는 <The Show>는 그래서 내 딸도 아닌데 눈물이 난다.
행복을 좇는데 행복하진 않은 거 같고. 뭐가 행복인지도 모르겠는 사람들. 외유내강한 척 연기하지만 외강내유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머니볼>은 단순한 구절 하나로 어느 햇살보다 따사로울 위로를 건넨다. ‘내 이야기도 어쩌면 이런 희극으로 완결될 수 있을까’를 기대하고 봤다면 더욱 그렇다. 내겐 아직 든든한 동지도 이쁜 딸내미도 없지만, 이 문장을 가슴에 품고 오늘도 내 영화를 만들어보련다. 이 문장을 까먹을 때 즈음, 또다시 아무것도 못하는 어린아이가 되었을 때. 나는 이 영화를 꽤 자주 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꽤 오래 버틸 수 있을 거 같다.
just injoy the show
P.S.
1.빈과 브랜드
2.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