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이라는 도피처

영화<밀양>(2007). 이창동

by 윤제경

<밀양>을 봤다.

울부짖는 포스터와 유쾌하지 못한 시놉시스. 이런 영화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지금 내 상황이 유쾌하지 못할수록. 어쨌든 난 <밀양>을 봤고 영화는 반갑고도 잔인한 상상력을 제시했다.


난 신애(전도연)가 얼만큼 불행한지, 얼만큼 슬픈지, 얼만큼 혼란스러운지. 그러던지 말던지 그 총량을 재는 데는 관심 없다. 뭐 어쩌라고. <밀양>이 재밌는 건, 기독교에 반감을 가지던 신애가 호감을 가지면서부터다.


일부 교인들에 대한 반감이, 나도 있다. 인간이길 포기한 행동들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행사하다가도 매주 일요일이면 회개한다는 그 심보가 나는 싫다. 믿음이 강해질수록 잔인한 사실관계들은 달콤해지고, 그로 인해 무너진 객관화는 어설픈 주관과 ‘좋은 사람’이라는 효능감으로 채운다. 서방 잃고 새끼 잃은 신애에게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기도회’라는 캐치프레이즈는 그렇게 달콤한 도피처로 찾아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피란 결국 유쾌한 결말로 다다르지 못하는 법이다. 당신이 숱하게 증명해낸 역사처럼.


희망 없이 불행만 가속되던 신애가 구원을 받을수록, 역설적으로 <밀양>은 반갑고도 잔인한 상상력을 제시한다. 만약 ‘기독교’를 ‘당신의 도피처’로 치환한다면. 그렇다면 <밀양>은 반가운가 잔인한가.


내 도피처는 술이었다. 첫 번째 사업 실패 후 고개를 들 곳도, 어깨를 펼 곳도 없던 그때 술맛이 그렇게 달 수가 없었다. 교회는 술집이었고, 예배날은 매일이었고, 교회사람들은 나 같은 단골손님들이었다. 그렇게 잠에 들면 편안한 꿈을 꾸고. 일어나면 다시 그 꿈을 위해 술을 마셨다. 무단횡단과 노상방뇨가 익숙해질수록 혼자인 시간은 덜 비참해졌고. 그 모습은 갈수록 역겨워졌다. 전도연과의 비주얼적 차이가 박차를 가했겠지만, 신애의 기독교와 내 술 사이 유의미한 차이점이 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밀양>이 제시한 상상력이 반가웠지만, 만약 술에 찌든 그때라면 잔인했을지 모르겠다. 과거형이면 반갑고, 현재형이면 잔인하다. 감독은 현재형인 신애를 붙잡고 바닥을 파고 파다 지하까지 들어간다. 신애 새끼를 죽인 유괴범과 교도소 면회 씬이다.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는데, 나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말에 신애의 기독교는 도피처였음이 증명된다.


잔잔한 분위기 속 미묘하게 전개되는 <밀양>은 사실 제육덮밥 먹고 바로 봐도 와닿는 영화는 아니다. 그래서 뚜렷이 보이는 몇 가지 단서들만 조합해 반기독교 영화로 정의되기도 하나, <밀양>이 말하고 싶었던 건 유치찬란한 승부 따위가 아닐 거다. <밀양>은 도피에 관한 영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기독교는 수단일 뿐.


이곳이 나를 구원해 준다는 믿음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를, 얼마나 부질없는 행동인지를 감독은 마지막 시퀀스로 보여준다. 인형처럼 힘없는 신애의 모습은 도피하던 인생의 최후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신애에게 밀양과 기독교는 첫 번째 도피처도 아니며, 마지막 도피처라는 확신마저 감독은 주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아플 뿐이다.


비밀스럽던 그 순간을 적나라하게 전시한 <밀양>이 반기독교 영화로 기억되기엔 이창동의 재능이 아깝다. <밀양>의 제목은 그래서 밀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