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효능
나는 제주가 싫다. 마치 한국의 겐지스강인마냥 거짓 힐링을 염가로 판다는 광고문구가 나는 싫다. 꼴사납다. 감귤은 마트가 제일 싱싱하고, 수산물은 강남이 가장 퀄리티 좋고, 한반도는 3면이 바다인데 뭘 제주까지 가나. 그렇게 제주가 좋으면 삼다수나 많이 먹어라. 전 국민이 힐링에 미쳐있던 그때부터 나는 제주가 싫어졌다.
것처럼 나는 싫어하는 게 아주 많다. 이것도 싫어 저것도 싫어 그냥 다 싫어. 그렇게 몇 년이 누적되니, 이것 참 할 게 없다. 싫어하는 건 많은데 좋아하는 건 몇 없다. 일만 한다. 어찌됐건 일단 제주로 왔다.
뭘 해도 안 풀리고 못 풀어내면서 성급하기만 했던 요즘, 도망가기 날이 참 좋다. 이왕이면 해외 도피가 좋았겠으나, 나는 여권이 없다. 비행기 정도는 타 줘야 제대로 도피한다는 느낌에 최저가 비행기를 타 최저가 게스트하우스에 묵는다. 숙소까지 걷는다. 렌트는 너무 사치스럽고 버스는 너무 서울 같다. 야자수와 듬성듬성한 렌트카 업체들이 여기 제주요, 를 피력 못 해 안달이다. 좁디좁다는 대한민국에 이렇게 듬성듬성한 곳이 있다니. 아니, 이건 흡사 아메리카가 아닌가.
1시간을 걷다 보니 배고파 미치겠다. 돌하르방도 맛있겠다며 밥 비벼 먹을 정도다. 눈에 걸린 고기국수 집에 들어가. 아, 정말 안 마시려 했는데. 나 심각한데. 외국인 관광객들이 자기들 먹다 남았다며, 막걸리를 준다. 술 좋아하게 생기셨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으나, 그게 글로벌로 통할 줄야. 아…음… 땡큐 베리 마치!
하루 숙박 1만 원 최저가 게스트하우스는 손님이 오거나 말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새삼 쿨하다. 뭐랄까… 장교 숙소 같은 방 구조가 병사 출신인 나로서는 나쁘지 않다. 밤은 깊어가고, 비는 오고 할 건 없고. 맥주나 마시자. 로비서 맥주를 홀짝이려는데, 한국 분이세요? 이 구역 인싸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와 그와 이미 한잔 중인 대만 교환학생과 맥주 하나 더 깐다. 까고 까고 까다 보니 나는 중국의 안보 문제와 서른의 꺾임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건장한 남자는 올해 서른하나로, 실업급여를 받으며 제주 카페 취업을 준비 중입니다. 원래 늙다리가 쏘는 거라며 이것저것 참 많이 얻어먹었다. 정이 많은 형이다. 대만 교환학생은 올해 스물다섯 살로, 공산당을 정말 싫어하고 말이 정말 많다. 후발대로 합류한 단발머리 대학생은 스물두 살로, 사회에 불만이 많지만 여행을 무엇보다 좋아한다. 아, 물론 다 남자다. 나도 남자고. 모두들 하나씩 쓰러지자 서른한 살 형님과 시마이 치려는데, 맥주 한잔하시죠.
누가 봐도 굉장히 심란해 보이는 남자가 건장한 남자 두 명에 애프터 신청을 하고, 술이 부족했던 우리는 오브 콜스! 근처 치킨집에 들어가 반반 치킨과 마시기로 했던 맥주 대신 이슬 3병을 깐다. 나보다 한 살 형인, 그 남자는. 반도체 취준생으로 제주에는 면접을 보러 왔다 한다. 그의 표정이 심란한 이유는, 면접을 망쳤기 때문이라고. 네 일이 내 일이고 내 일이 네 일이라 듯 뜨거운 희망을 품고 다짐을 하고. 그러다 대화 소재가 떨어진 우리는 군대 이야기로 심폐소생술에 성공한다. 멸공! 멸공! 아, 이것이 전우애란 말인가. 아 물론 나는 공군이다. 나의 오바이트를 피날레로 우리는 각자 방에 들어가 곯아떨어졌다.
양치도 깜빡하고 곯아떨어진 덕에. 내 술 냄새를 못 견뎌 예상보다 일찍 일어났다. 제주 삼다수 대신 3병에 천 원, 석수를 원샷하고 양치하고 음… 뭐할까. 일단 여길 뜨자. 버스를 타고 산이 보이고, 바다가 보이고 이제 정말 제주에 온 거 같다. 에어컨 없이 연비 운전 중인 기사님의 큰 뜻은, 창문 열어 바람이나 느끼라는 어명처럼 느껴진다. 바람이 살랑살랑하고 술이 술술 깨고. 좋긴 좋구나 야. 환승 1회, 도합 62 정거장을 지나 성산에 왔다. 이곳의 바다와 바람과 현무암에 술이 술술 깬다. 먼지 낀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고 파도를 기다리고 다시 찍고 거북손을 찍고 이거 왠지 드라마 주인공 된 거 같다. 오션뷰 카페에 들어가 금년 최고의 사치, 카라멜 마끼야또를 주문해 천천히 음미하는데 어 이거 뭐냐. 깊은 맛의 비결은 모기 한 스푼이었다. 그래 네가 내 성급한 마음씨를 쪽쪽 빨아먹었겠거니 낙관할 수밖에.
근처에 새로 옮긴 게스트하우스는 쫌 비싸다. 하루당 2만 원. 높아진 가격만큼 높아진 퀄리티이나 주인장의 가계부가 걱정될 정도로 이곳에 손님은 나 혼자다. 손님기근은 이 집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밥때가 되자 알았다. 이 근방에 식당은 10곳이 채 되질 않는데, 그중에 절반은 동네주민들 호프집이고 나머지는 재료소진으로 이미 퇴근들 했다. 그것참 워라벨이 좋은 동네다.
그렇게 걸어도 걸어도, 검색을 해도 해도 식당이 없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데, 젊을 때 고생은 사서 한다는데. 나는 어느 쪽인가. 저기 분명 식당은 식당인 포장마차가 눈에 걸린다. 식사 되나요라고 물어봤는데 같이 한잔 하시죠, 라는 황당한 대답이 돌아온 건. 사장님이 만취다. 사장님 일행 누나가 해물라면을 끓여줬다. 농심 오징어 짬뽕은 먹어봤어도 이런 건 처음이라. 하마타면 소주 하나 깔 뻔했다. 그런데 국물은 좀 싱겁더라 누나.
분명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안 온다. 책 좀 보다가 원고 좀 쓰다가 유튜브 좀 보다가 새벽 4시다. 그래, 날이 밝으면 성산일출봉을 가보자. 늦잠을 잤다. 분명 새벽에는 엄청 추웠는데 겁나 덥다. 버스에 타 검색한 식당서 삼겹살 1인분을 먹었다. 먹고 나서 안 사실인데, 수입산이더라. 고기 추가 3,000원을 대가로 나머지는 걸어가기로 한다. 그게 1시간이나 걸릴 줄 나는 몰랐다. 말이 유유자적 지나가는 풍광에 감탄하다 말똥 냄새에 인상 쓴다. 살랑살랑한 바람에 기분 좋다 쨍쨍한 햇살에 기분 나쁘다. 발에는 물집이 잡힌 거 같다. 것도 모르고 긴팔에 긴바지 입었다 공짜사우나 한번 시원하다. 싶을 때 성산일출봉이 보인다. 아…
그러니까 나는 성산일출봉이 그렇게 클 줄 몰랐다. 1시간을 걸어왔는데, 1시간을 등산해야 한다. 남녀노소 잘만 올라가는 가벼운 등산코스를 나 혼자 한라산 등정했다. 그리고 실망했다. 성산일출봉 안에 들어가 뛰어노라는 줄 알았는데, 전망대에서 감상만 하란다. 그래도 올라온 게 아까워 여기저기 구경 좀 하고 사진 좀 찍는다. 나쁘지 않다.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하산해 원산지 불명 감귤 슬러시 하나 때리고, 동네를 기웃대다 그냥 숙소 가는 버스에 탔다. 관광지에서는 식사 하는 거 아니고, 맛집을 가자니 버스로 1시간. 2시간. 올 땐 취해있을 텐데, 그건 출장이지 여행이 아니다. 아, 생각이 짧았다. 맞어 여기 식당 없지.
또 걷는다. 1시간을 걸었다. 이쯤 되니 행군하는 느낌이다. 도중에 칼국수집이 하나 있었으나, 나는 칼국수가 싫다. 시원한게 미친 듯이 먹고 싶다. 여길 누가 오긴 올까 싶은 곳에 위치한 물회 집에 들어가 모둠물회와 한라산을 주문한다. 그것참 맛이 상당하다. 내가 물회를 좋아했다는 걸, 오랜만에 깨닫는다. 한라산의 깔끔함이 박차를 가한다. 알딸딸도 하겠다. 1시간을 걸어야 하는데, 즐겁다. 길 가다 양심 서점을 발견해 들어갔다. 마감 20분 전에 들어가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훔쳐 가고 싶은 책들이 몇 있더라. 그중에 LP가 있길래, 난생처음 들어봤는데. 이것도 훔치고 싶다. 양심 서점이라 내 양심을 자주 테스트하는 건가. 아무튼 여기가 마음에 들어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방명록도 남겨뒀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기겁할 노릇이다.
라지만 나는 아직 30분을 더 걸어야 한다. 휴대폰 빠떼리도 나갔다. 노래를 듣다 노래를 불렀다.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이등병의 편지>, 윤종신의 <오르막길>을 불렀다. 오랜만에 불러본 노래가 듣기는 모르겠고 부르기 좋다. 몇 개 더 부르고 싶었는데, 가사가 기억 안 나 허밍만 했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청승과 궁상이었다는 게, 이로써 증명됐다.
숙소에 들어가 땀 찬 청바지와 양말을 벗고 그대로 잠들었다. 눈 떴는데 1시 반이다. 좀만 더 자자. 자자. 그러면 꼭 잠이 깨더라. 5시까지 유튜브와 OTT와 쇼츠와 릴스를 보다 숙소를 나서니, 또 배가 고프다. 앞서 말했지만 이곳은 식당이 없고 편의점은 24시가 아니다. 이 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해 보이는 슈퍼 하나를 용케 발견해 그곳에서 사발면을 먹었다. 그러면서 본의 아니게 일출을 보게 됐다. 아무렇게나 찍어도 잘 나오는 사진에 포토그래퍼로의 전향을 고민해 본다. 그리고 다시 자빠져 잤다.
일어나니 점심. 배가 얼마나 성실히 고픈지, 요근래 사라졌던 식욕이 부활했나. 버스 타고 시장으로 가 장터국밥을 주문한다. 젊은이는 없고 어르신들만 가득한 걸 보니, 잘 왔나 싶다. 다들 막걸리 하길래 나도 하나 했다. 렌트를 안 한 내가 자랑스러운 낮술이다. 제주에 와 먹은 음식 중 가장 저렴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다. 만 원에 식사와 음주를 동시에 해결하고 또 걷는다. 어제 잡힌 물집이 아프지만 그렇다고 딱히 할 것도 없다. 해수욕장에 가 땀을 식히고 빵집에 들러 소금빵 하나 먹었다.
숙소 근처로 돌아와, 카페에 갔다. 이쯤 되면 내가 먹을 거에 환장한 놈 같겠지만 나는 평소 식사와 음주 빼곤 정말 뭘 안 먹는다. 서울이 더 잘할 거 같은 한라봉 감귤에이드인가 뭐시기인가를 마시며 원고를 쓰고, 책 좀 보다 또 밥때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길 바라며, 나는 정말 배가 고파졌다. 어제는 재료소진이라던 백반집이 영업 중이라길래 된장찌개 하나와 한라산 하나 주문한다. 웃긴 건 한라산과 백반 가격이 큰 차이가 없다. 아무튼 먹고 마시고 또 걷는다. 어제 갔던 양심서점에 가 LP 좀 듣다 노래 좀 부르다 맥주와 까까 하나 사 들고 숙소로 돌아와 원고를 쓴다. 내일 점심 비행기로 나는 돌아간다. 원고를 쓰는 이 시간이 정말 이곳에서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제주라고 별 건 없었다. 육지보다 시원하고 바다가 많고 현무암이 많다. 잠이 덜 깬 아침에 산발머리 긁적이고 있는데, 문득 다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게 그러니까. 어떻게 산 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나는 왜 또 그랬나. 성급해 실수범벅인 요즘을 한탄하다 그것참 별일 아니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아쉬울 뻔했던 아침이 반갑다.
나 제주 싫은데. 그런데 좀 가기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