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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제경 May 31. 2024

제주의 효능(1)

일단 제주로 왔다


일단 제주로 왔다. 욕 아니면 한숨 밖에 나오질 않는 요 근래에, 도망이나 가자. 이왕이면 해외 도피가 좋겠으나, 나는 여권이 없다. 어디 가세요, 나도 몰라요. 무계획으로 최저가 비행기에 타 최저가 게스트하우스에 묵는다. 숙소까지 걷는다. 렌트는 너무 사치스럽고 버스는 너무 서울 같다. 야자수와 듬성듬성한 렌트카 업체들이 여기 제주요, 를 피력 못 해 안달이다. 좁디좁다는 대한민국에 이렇게 듬성듬성한 곳이 있다니. 아니, 이건 흡사 아메리카가 아닌가. 


1시간을 걷다 보니 배고파 미치겠다. 돌하르방도 맛있겠다며 밥 비벼 먹을 정도다. 눈에 걸린 고기국수집에 들어가. 아, 정말 술 안 마시려 했는데. 외국인 관광객들이 자기들 먹다 남았다며, 막걸리를 준다. 술 좋아하게 생기셨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으나, 그게 글로벌로 통할 줄야. 아… 땡큐 베리 마치! 여기 막걸리 한 병 더 주쇼!


하루 숙박 1만 원 최저가 게스트하우스는 손님이 오거나 말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새삼 쿨하다. 뭐랄까… 장교 숙소 같은 이 구성이 병사 출신인 나로서는 나쁘지 않다. 밤은 깊어가고 비는 오고, 술이나 하자. 로비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려는데. 한국분이세요? 같이 하시죠. 이 구역 인싸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와 그와 이미 한 잔 중인 대만 교환학생과 맥주 하나 더 깐다. 까고 까고 까다 보니 나는 중국의 안보 문제와 서른의 꺾임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건장한 남자는 올해 서른하나로, 실업급여를 받으며 제주 카페 취업을 준비 중이다. 원래 늙다리가 쏘는 거라며 이것저것 참 많이 얻어먹었다. 대만 교환학생은 올해 스물다섯 살로, 공산당을 정말 싫어하고 말이 정말 많다. 도중에 합석한 단발머리 대학생은 스물두 살로, 사회에 불만이 많지만 여행을 무엇보다 좋아한다. 아, 물론 다 남자다. 나도 남자고. 모두들 하나씩 쓰러지자 서른한 살 형님과 함께 시마이 치려는데. 저기… 맥주 한잔하실래요?


누가 봐도 굉장히 심란해 보이는 남자가 건장한 남자 두 명에 애프터 신청을 하고. 술이 부족했던 우리는 오브 콜스! 근처 치킨집에 들어가 반반 치킨과 마시기로 했던 맥주 대신 이슬 3병을 깐다. 나보다 한 살 형인, 그 남자는. 반도체 취준생으로, 제주에는 면접을 보러 왔다고 한다. 그의 표정이 심란한 이유는, 면접을 망쳤기 때문이라 한다. 네 일이 내 일이고 내 일이 네 일이라 듯 뜨거운 희망을 품고 다짐을 하고. 그러다 대화 소재가 떨어진 우리는 군대 이야기로 심폐소생술에 성공한다. 멸공! 멸공! 아, 이것이 전우애란 말인가. 아 물론 나는 공군이다. 나의 오바이트를 피날레로 우리는 각자 방에 들어가 곯아떨어졌다. 


양치도 깜빡하고 자빠진 덕에, 내 술 냄새를 못 견뎌 예상보다 일찍 일어났다. 제주 삼다수 대신 3병에 천 원, 석수를 원샷하고 양치하고. 음… 뭐 할까. 일단 여길 뜨자. 버스를 타고 산이 보이고, 바다가 보이고 이제 정말 제주에 온 거 같다. 에어컨 없이 연비 운전 중인 기사님의 큰 뜻은, 창문 열어 바람이나 느끼라는 어명처럼 느껴진다. 바람이 살랑살랑하고 술이 슬슬 깨고. 좋긴 좋구나 야. 환승 1회, 도합 62 정거장을 지나 성산에 왔다. 이곳의 바다와 바람과 현무암에 술이 술술 깬다. 먼지 쌓인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고 파도를 기다리고 다시 찍고 거북손을 찍고 이거 왠지 드라마 주인공 된 거 같다. 오션뷰 카페에 들어가 금년 최고의 사치, 카라멜 마끼야또를 주문해 천천히 음미하는데 어 이거 뭐냐. 깊은 맛의 비결은 모기 한 스푼이었다. 


한가한데 바쁘고, 바쁜데 한가한 어제와 오늘이 평화롭다. 매사 성급해진 마음씨를 카라멜 마끼야또 안 모기가 쪽쪽 빨아먹었겠거니 바래본다. 날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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