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kaibutsu, 2023)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한국에서 인기도 많고 팬도 많다. 해외에서도 특히나 팬이 많은데 일본의 사회문제를 다루지만 깊이 들어가보면 인류의 보편적인 감정과 내용을 담고, 항상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레에다 감독은 특히나 가족을 다룬 영화에서 그 빛을 발해왔다. '어느가족(2018)', '아무도모른다(2004)', '그렇게아버지가된다(2013)' 등 사회문제와 비정형적인 가족을 결부시켜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의 영화에는 항상 아이와, 가족, 그리고 혈연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가족이 나온다. 특이하고 비정형적인 모습들을 누구보다 따스하고 연민어린 시선으로 그리는 그는 아마 이 세상을 가장 따뜻하게 바라보는 감독이 아닐까 싶다.
영화를 볼 때 역사물일 경우 사전 정보를 미리 알고 가는걸 추천하고 그 외에는 모두 어떠한 정보도 없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런 경우 포스터가 매우 중요해지는데 사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그동안 그리 끌리는 포스터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 '괴물'이란 작품은 포스터부터 아주 강렬하고, 보고싶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포스터 속 신인 아역배우의 흙투성이 모습들을 보고 소노 시온의 '두더지(2011)'를 떠올리다가도 '아무도 모른다(2004)'를 떠올리게 한다. 전혀 닮지 않은 아이 둘이 흙투성이에 강렬한 눈빛으로 프레임 속에서 우리를 응시하는 포스터는 두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게 한다.
이번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색이 가장 옅은 듯 하면서 그의 작품임을 뚜렷하게 증명해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스타 각본가지만 영화제와 큰 인연이 없는 '사카모토 유지'와 처음 함께하는 작업이 이토록 아름다울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로써는 사카모토 유지의 작품을 다시 찾아보게 될 정도로 두 사람의 만남은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냈다고 생각된다.
영화에는 두 아이와 세 명의 어른이 나온다. 그리고 세 개의 시점으로 1,2,3부가 나누어지는데 처음은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의 엄마인 사오리(안도 사쿠라), 그리고 다음은 미나토의 담임 선생님인 호리(나가야마 에이타), 마지막은 미나토의 이야기다. 세 어른 중 한명이며 시점이 아주 잠깐 나온 마키코(다나카 유코)는 여러모로 튀는 인물이다. 이 이야기는 조금 더 나중에 하겠다.
*이 이후부터는 영화의 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0. 이야기에 앞서
칸 영화제 역대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받았던 야기라 유야는 아무도 모른다로 당시에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그 눈빛이나 외모가 여러모로 미나토 역을 맡은 쿠로카와 소야와 꽤 닮은 듯 하다. 이번 영화를 보며 인상깊었던 건 안도 사쿠라나 다나카 유코의 연기보다도 아역들의 연기였다. 어찌나 자연스럽게 하는지 정말로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 같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첫 연기라면 더욱 힘들었을 소재에도 그 감정을 잘 표현한다는게 왠만한 성인 연기자들보다도 더 뛰어났다.
영화의 시작은 엄마인 사오리의 시점으로 시작된다. 싱글맘으로 사별한 남편 대신 아이를 열심히 키우는 여성이다. 하지만 점점 아이의 이상한 행동을 발견하고 괴롭힘을 의심한다. 담임인 호리 선생님이 그랬다는 말에 학교로 몇번이고 찾아가 시정을 요구할 정도로 적극적이기도 하다. 결국 선생님은 정직되었지만 해결된 건 없이 갑자기 사라진 아이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시작되는 2부는 담임인 호리의 이야기. 처음엔 답답하기만 했던 교사들이나 열받는 담임이 2부가 시작되면 꽤나 편파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1부는 사오리의 시점이기 때문에 그녀가 바라보는 호리나 교장의 모습은 아주 비열하거나 무감정한 괴물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각자의 이야기가 나오며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일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호리의 시점역시 개인의 편향이 묻어있다. 여자아이가 고양이를 가지고 노는 미나토를 봤다는 말만 듣고 이후에 미나토가 고양이를 죽인 것 같다고 말해달라는 부분이 가장 그렇다. 같은 반 여자아이는 미나토가 고양이를 죽였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호리는 미나토가 요리를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해 그런 과격한 행동을 했을 거라고 멋대로 추측했을 뿐이다.
두 어른의 시점에서 보기 힘든 건 아이들의 웃음이다. 각자 아이를 잘 키우고 잘 가르치기 위해 노력한다고 여기지만 그 보살핌을 받는 아이들의 감정을 이해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이기적인 동정이나 적선과 다름없다. 어른이 될수록 남을 돌보기보다 나 스스로를 돌보기 마련이다. 특히나 싱글맘인 사오리나, 싱글맘을 두었던 호리나 세상의 편견에 맞서려면 더욱 스스로를 강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강요되는 '남자다움'이나 '깅함'은 스스로가 깨우치지 못하는한 그저 폭력으로 되돌아올 뿐이다.
사오리는 미나토를 위해 아빠에 대해 좋게 포장했겠지만 미나토는 아버지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를 잘 알고있다. 호리는 무서운 인상을 풀려고 억지로 웃고 과도하게 친절을 베풀지만 아이들의 깊은 문제는 보지 않는다. 세상에 완벽한 어른은 없다는 걸 아이들은 잘 알고있지만 어른들이 정작 스스로를 속이고 아이들을 속이려고 한다. 아이들은 누구보다 진실을 잘 알고있다는걸 어른들만 몰랐다. 미나토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호리가 인상은 무섭지만 사실 착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유일하게 시점이 자세하게 공개되지 않은 어른이 교장인 마키코다. 마키코의 시점이 나오지 않은 이유는 아마 어른들 중 유일하게 미나토와 동질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마키코역시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고 그것을 기억에서 잊어버릴 정도로 회피했지만 인정하고 학교로 복귀를 했다.
미나토는 호리나 어머니, 그리고 사회로부터 강요받는 남자다움으로부터, 마키코는 교장이라는 직위 안에 갇혀 거짓말을 만들어낸 인물들이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가 큰 영향으로 돌아올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솔직함보다는 거짓을 택한 이들의 괴로움은 누구의 것도 아닌 결국 자신만의 것이다.
3부에 들어서 미나토에게 트럼본을 불어보게 시키고 자신은 호른을 부는 모습은 두 사람 다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을 고둥으로 뿜어내기 때문이다. 두 사람다 다른 사람들에게 남의 탓으로 돌리는 거짓말을 했고 그 문제로 치열하게 고민을 겪는 인물들이다. 사오리와 호리의 시점에서는 괴물처럼 보였던 미카코가 사실 미나토에게는 그저 인자하고 자신과 비슷한 거짓말의 아픔을 겪고있는 할머니였다는 건 두 사람만이 알았다.
누구나 누릴 수 없는 건 행복이라 부르지 않는단다.
어찌보면 이 말은 마키코가 스스로에게 되뇌이는 말과도 같다. 사랑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는 미나토가 가장 듣고 싶었을 말을 마키코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이런 마키코가 태풍이 불던 날 다리 위에 자살을 암시하는 듯 서 있었지만 그녀역시 결말에는 행복해질거라 생각한다. 행복은 그녀조차도 누릴 수 있는 것이기에, 거짓말로 남을 고통에 빠트렸지만 결국 죽음이 아닌 삶으로서 행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큰 스포일러를 말하자면 이 영화의 장르는 퀴어영화다. 2부까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두 아이의 관계는 3부인 미나토의 시점이 되어서야 알 수가 있다. 우정이라 하기에는 더 애틋하고 사랑스럽지만 한편으로는 무섭기도한 그 감정은 세상에 나오는 순간 모든 몰매를 맞을게 뻔해 숨기고 거짓말한다.
특히나 요리는 이미 모든 것에 포기한 아이다. 두 사람이 게임을 할 때 나무늘보를 설명하며 공격성이 모든 걸 포기하고 늘어진다고 설명한다. 그러자 미나토는 이 괴물이 요리냐고 묻는다. 요리는 어릴 때 이식받은 뇌, 그리고 남들과 다른 성적지향성이 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한다. 심지어 학교에서도 괴롭힘을 당하지만 어떤 반항도 하지 않은채 모든 걸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다. 마치 나무늘보처럼. 그런 요리의 행동은 일종의 자신만의 공격이자 방어다. 하지만 그걸 알아주는 어른들은 아무도 없다.
요리는 모든 걸 포기하는 듯 싶지만 실제로 하나씩 단서를 남겨놓는다. 작문 숙제에 자신과 미나토의 이름을 숨겨둔 것처럼. 누구보다 어른들이 알아주기 바라고 있는 것이다.
1,2부와 3부의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 아이 미나토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두사람이 어떻게 친해졌고 어떤 생활을 하는지가 잘 드러난다. 두사람의 관계는 두사람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다. 미나토가 요리를 좋아하지만 다른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요리와 싸우는 등 그런 행동들은 누구나 공감할만한 것들이다. 하지만 미나토의 이야기를 보기전까지 사오리와 호리의 시점만으로는 우리는 아이들이 어떤 비밀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요리의 다친 상처는 사오리가 발견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고 잔인했다. 어쩌면 요리의 문제를 깊이 파고들고싶지 않은 사오리의 눈에는 부러 요리의 상처가 약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 호리는 요리의 아버지가 알콜중독 수준에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닌걸 봤음에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깊게 들어가지 않고 미나토가 요리를 괴롭힌다고 멋대로 결정내린다. 더 복잡한 무언가가 있을 수 있음을 회피해버리고 자신이 편한대로 생각하는건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더 두려워하고 무섭게 여기며 한편으로는 제 멋대로 잣대를 규정해버린다. 사오리는 호리와 다른 선생님들을, 호리는 미나토를 괴물로 생각했다. 서로 각자가 쉽게 왜곡할 상대를 고른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더 깊이 알았을 때도 그 사람을 과연 괴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이 영화가 던지는 메세지는 너무도 뚜렷하다.
우리가 살면서 누군가를 멋대로 규정해 상처를 준 적은 없었는지
사오리는 교장과 호리를, 호리는 사오리와 미나토를, 그리고 영화 속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특정 대상을 각자의 프레임에 가두어 보고싶은 것만 보지 않았는가. 영화의 배경이 된 마을엔 큰 호수가 바다처럼 펼쳐져 있다. 얼핏 바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땅 속에 가두어진 호수라는 공간이다. 하지만 누군가 볼 땐 바다로 볼 수도 있는 것을 우리는 쉽게 단정지어버리고 언제나 강한 생각 안으로 가두어버린다.
사실 괴물은 없었다.
이 영화의 제목은 괴물이지만 괴물은 나오지 않는다. 이곳에서 괴물이란 결국 우리가 만들어낸 상상의 존재,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괴물로 만들어 버린다. 더 깊게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 생각을 쉽게 풀어내려고 괴물을 만들고 그 대상을 쉽게도 미워하고 비난한다.
이 영화는 편견을 쓰지 말라고 하는 영화가 아니다. 우리의 프레임으로 인해, 누군가를 상처준 적이 없는지 곰곰히 생각해보라는 성찰적인 주제를 가진다. 그건 누군가 강요해서 되는게 아니라 스스로가 느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일본의 사회만은 나타내려 보통에 대한 강요를 나타냈겠지만 그건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역시 보통과 평범함에 대해 기준을 두고 그것을 벗어나면 쉽게 비정상적인 것으로 단정짓고는 한다. 가족에 대한 형태나, 외모나, 심지어 유행까지도.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받은 사람은 거짓말로 또 남을 파멸시킨다. 이런 문제점을 당장 뜯어고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조금만 더 주변과 평범함이 아닌 다름을 가진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자는 것이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가장 비정상적인 건 요리와 미나토지만, 요리는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아이다. 미나토는 다름을 받아들이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방황한다. 같은 반 아이의 외형적 특징을 놀리라고 강요받았을 때 요리는 그 아이의 특징을 칭찬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그런 말을 하면 아이가 기분나빠할 거란 걸 말한다. 요리는 그런 낙인으로부터 수도없이 상처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리가 찾아낸 버려진 기차는 스스로를 보호하는 대피소였다. 아무도 없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공간은 요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을 비난과 강요가 없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 공간은 미나토와 요리만의 공간이다. 아무도 모르는 두사람만의 공간은 두사람이 가장 친밀하고 자신답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이다. 여러 일들이 있었음에도 결국 미나토는 요리를 위해 차에서 뛰어내리고 태풍이 부는 날 기차로 간다. 가장 힘들고 괴로운 시간 속에서 두사람은 자기자신을 지키기 위한 쉘터를 만들었다. 버려진 기차이지만 그 안에 진짜 자신을 두는 것이다.
그 약하고 불쌍한 공간은 결국 산사태로 파묻힌다.
사오리와 호리가 그 기차를 찾았을 땐 이미 두 사람은 없었다. 이후 결말에 대한 추측이 상당히 많지만 나는 희망차게 보았다. 두사람이 이미 빠져나가 앞으로의 생을 살아하고 또 그 일을 계기로 두 아이가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을거라고 생각한다. 기차를 앞으로는 빠져나가지 못했지만 밑의 구멍을 통해 길고 좁은 통로를 지나 나온 곳에는 더 이상 문이 가로막지 않은 철길이 놓여져 있었다.
가로막지 않은 철길의 철길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쉘터가 없어도 두 아이는 자기자신으로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리고 자신을 지키면서 동시에 상대방을 사랑하는 방법도 알았을 것이다.
"우린 다시 태어난걸까?"
"그런 건 없는 거 같아"
"다행이다"
다시 태어난다는 건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버리고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건 진짜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두 아이는 결국 스스로 바뀐게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일 때 가장 아프고 괴롭지만 또 가장 안심이 되는 것만큼 모순적이고 아름다운 순간도 없을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