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등, 2015>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을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제목이 아닌가 싶다.
‘4등’. 대회에선 메달이나 단상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등수다. 국립국어원에 쳐보니 ‘순위’와 ‘등수’의 의미가 미묘하게 달랐다.
순위 : 차례나 순서를 나타내는 위치나 지위 (차례)
등수 : 등급에 따라 정한 차례
4위는 순위의 이름이지만 4등은 등수의 이름이다. 순위는 단순히 위치의 이름이지만 등수는 등급을 나타내는 이름이었다. 등급에는 당연하게도 경쟁이 따른다. 우리는 경쟁시대에서 살고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과열된 경쟁 속에서 살아간다. 누구는 자본주의, 자유주의의 근본이고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나역시 경쟁인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나역시 끊임없는 경쟁을 통해 대학에 들어가고, 대회에 나가 상을 받고, 때로는 직장도 구한다. 20년을 넘도록 경쟁을 통해 얻어온 것이 잃은 것보다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에 끊임없이 느끼는 회의감은 지울 수가 없다. 열심히 하다가도 어느 순간이 되면 ‘정말 지금 하고 있는게 맞는건가?’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거지?’ 늘 물음이 스스로에게 던져진다. 그건 우리가 경쟁을 하는 진정한 의미조차 찾지 못한 채 무지성으로 사회나 타인에 의한 경쟁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경쟁에서 승리를 곧 성공으로 연결시킨다. 하지만 성공은 행복이 아니듯이 승리는 행복이 될 수 없다. 승리를 해도 진정한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승리를 온전히 만끽할 수 있을지는 깊이 고민해봐야할 문제다.
4등은 일상속에서 숨쉬듯이 느껴지는 경쟁에 대한 압박감과 아이의 성장을 잘 섞어내었다. 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물 속에서의 장면과 낡은 과거를 보여주는 듯한 코치 광수의 과거는 영화의 의미를 한층 더 살려준다. 처음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제작으로 ‘인권위원회’가 뜬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가 어떤 것을 말하려는 것인지는 모두 예상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에서 더 나아가 이영화는 개인의 성장과 개인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사회와 어른들의 역할 등에 대해 더욱 깊고 신중한 질문을 던진다. 이 세상은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로 나눌 수는 없지만 이 영화의 경우는 ‘좋은 영화’로 추천하고 싶다. 지친 경쟁에서 살아가는 모두를 위한 성장과 치유를 위해.
처음 시작은 코치인 광수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시아 신기록이었을정도로 재능이 있었지만 감독의 폭력에 결국 일찍이 선수 생활을 접고 동네 수영장에서 아이들의 경기 중 정신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치환된다.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다라면, 아시아 신기록에 1위까지 한 그는 왜 지금 그런 삶을 살고 있는가. 영화 내내 광수의 행동은 정당화 될 수 없지만 그 행동의 시발점이 된 일들은 짐작가능하다. 감독의 폭력으로 국가대표를 그만둔 그가 똑같이 준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준호는 그것을 동생에게 답습한다. 폭력의 연쇄는 이미 역사적으로나 일상에서나 많이 확인된 사실이지만 알면서도 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묻는다. 그 피해자는 다시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는 피해자를 만드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광수의 선수시절은 보는 사람이 화날만큼 철없고 잘못된 행동이긴하지만 그것이 폭력을 당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만약 처음 광수의 무단이탈로 맞는 것을 보고 당연하다고 느꼈다면 폭력에 익숙해져버린 자신을 되돌아봐야만 한다. 어떤 이유로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고 특히나 교육의 이름으로 폭력은 있을 수 없다. 어른이 된 광수는 자유를 찾지 못한 준호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제대로 된 어른이 되지 못한 광수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폭력을 저지른 코치, 또는 묵인한 다른 코치와 어쩌면 외면한 준호의 아버지일 수도 있다.
또 다른 폭력의 양상은 준호의 어머니에게서 나타난다. 흔히들 말하는 극성적인 어머니인 준호엄마는 아이를 재능이 있는 준호를 따라다니며 레슨 지켜보고, 대회를 따라다닌다. 아이에게는 4등이 좋냐며 타박하고 코치가 폭행을 저지르는 것을 알면서도 순위가 오르면 괜찮다고 묵인한다. 현재에는 이런 것이 아동학대에 방임으로 엄중한 처벌을 받지만 아직까지도 체육 예술계에 이런 일들은 자주 일어난다. 나역시 학생시절 레슨을 받으며 선생님에게 일상적으로 체벌을 받았고 학원에 가는 것이 두려워 울면서 엄마에게 통화한 적도 있었다. 성인이 되고나서도 강렬하게 남은 그 기억들은 아동에 대한 폭력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루어져선 안된다는 내 신념을 지키는데에 중요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준호엄마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이에게 쏟아붇고는 아이의 성적을 자신 혼자만의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아이에게 자기 자신을 몰입한 채 승리조차 혼자만의 것으로 놔두지 않는다. 준호가 수영을 그만둔다고 했을 땐 동생인 기호에게로 그 화살을 돌린다. 극단적일 수 있지만 그녀는 아이를 하나의 소유품으로 취급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무시하지 못하는 점은 이런 일들이 현실에서도 심심치않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몇년전 아이가 부모를 잔인하게 난도질한 사건이 있었다. 시사프로그램에 소개될 정도로 매우 잔인하고 전국민을 놀라게 한 사건이었는데 더 놀라운 점은 동생이 그 형의 살인을 감싸주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의 부모는 성과에만 집착하며 아이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형은 그 압박과 멸시, 폭력을 내내 견뎌오다 참지 못하고 발산한 사건이었다. 이역시 매우 극단적인 사건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의견과 그래도 너무 잔인하다는 의견이 나돌았다. 하지만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낸 것은 그 살인범이 된 아이의 부모의 잘못이었다. 아이에게는 어른이 필요하지만 그 부모는 아이에게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주지 못한 것이다.
준호 엄마는 ‘아이가 코치에게 맞는 것보다 4등을 하는 게 더 무섭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필히 어른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광수를 보듯이 대물림 되어온 경쟁에 대한 집착은 사회가 만들어내고 집단이 만들어낸 광기와도 가깝다. 사람들은 1등에 열광하고 1등이 아니면 외면한다. 처음 티비에서 보여주는 박세리 선수의 모습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박세리 선수 그 자체보다도 1등을 한 사실에 더 찬사를 보낸다. 준호는 과정도 ‘맞지 않고 1등하는 것은 대단하다’며 과정역시 결과만큼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사회와 어른들은 과정보다도 결과에 더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는 느끼고 있는 중요한 의미를 어른들이 모르는데 어느 누가 아이를 잘 이끌어줄 수 있겠는가.
준호의 아빠는 엄마처럼 극성적이지 않다. 엄마와 비교했을 땐 자유로운 아버지처럼 보이지만 그역시 폭력을 행사한 어른 중 한명이다.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작중 내내 방조의 자세를 취한다. 처음엔 광수의 젊은시절 감독의 폭력에서 외면한 것과 이후에는 준호의 폭력을 해결할 것처럼 굴었지만 결국 광수에게 돈봉투를 건내고 폭력을 멈추라고만 말하지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는 않는다. 얼마든지 신고나 기자의 신분으로 언론에 제보할 수 있었지만 협박으로만 끝낼 뿐 자기 자식의 문제임에도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는 그는 폭력을 방조하는 어른의 유형을 보여준다. 준호 아빠는 결국 아이가 좋아하던 수영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할 때가 되어서야 코치를 그만두게 만든다. 게다가 아이가 수영을 진정으로 좋아하는지는 관심을 가지지도 않고 그저 그만두게 만들 뿐 문제의 해결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에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 역시 피해자에겐 또다른 폭력으로 이어질 뿐이다.
준호가 이 이야기에 주인공인 이유는 아직 ‘아이’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떻게 성장해 나갈지 모르고 어떤 일들을 겪을지 모르는 아이는 재능이 있지만 경쟁에서는 늘 4등을 한다. 1등 메달은 없지만 시합이 끝난 후 탈의실에선 또래들과 웃고 이야기하는 순수함을 가졌다. 이 영화는 경쟁과 이로 인해 이루어지는 폭력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한 아이의 성장 영화로도 볼 수 있다. 준호는 처음엔 등수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물속에서 노는게 그저 좋은 아이일 뿐이다. 1등을 하는 또래 선수가 가지고 다니는 헤드셋을 보고 자기도 가지고 싶어 1등을 하고 싶어한다. 너무 단순하고 작은 이유지만 아이에게는 동기부여가 된다. 하지만 1등을 하고 싶어 시작된 광수의 코칭은 폭력적이고 결국 수영을 그만두게까지 한다. 그럼에도 준호는 수영이 좋다. 수영을 그만 둔 이후에는 수영을 계속 하고 싶기 때문에 1등을 하고싶다고 말한다. 그런 준호에게 광수는 ‘혼자해라’라며 아이를 두고 떠난다. 혼자 새벽에 몰래 수영장에 들어간 아이를 이상하게 보는 엄마에게도 말하지 않고 홀로 대통령배 수영대회에 나간 준호는 그곳에서 1등을 해낸다. 진정한 승리는 자유 속에서 쟁취되는 것이다. 아이는 내면의 성장과 함께 승리를 쟁취한다. 이건 경쟁을 통해 얻어낸 것이 아니다. 타인과의 경쟁을 통한 성취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치열하게 내면을 싸우고 얻어낸 값진 성찰과 성장이다.
수영은 정해진 레인에서 누가 먼저 빨리 도착하느냐를 겨루는 기록 경기이다. 현대의 사람들은 수영장 레인 위에서 움직이는 것과 같다. 누가 먼저, 누가 빨리를 끊임없이 겨루며 주변에서는 우리를 압박하고 멋대로 하려든다. 때로는 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폭력도 불사한다. 그 혼잡하고 강압적인 환경 속에서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과 순수한 의미같은 건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찾으려들지도 않는다.
레인이 모두 풀어진 수영장에서 준호가 어두운 하늘의 달빛을 쫓아 수영하는 장면은 어떤 감동적인 말이 없어도 아름답고 벅차오르게 한다. 경쟁자도 없고 레인도 없는 수영은 자유롭고 온전한 힘을 그대로 내어 움직일 뿐이다. 달빛이든 손전등의 빛이든말이다. 준호는 ‘햇빛은 우주에서 오는거니까 햇빛을 받으면 우주의 힘을 받아 힘이 난다’라고 말했다. 아빠의 회사 동료도 놀랄 만큼의 깊은 의미가 느껴진다. 아이는 순수하게 깨우쳤지만 때로는 어른들이 그것을 파괴할 때도 있다. 아이는 폭력적인 과정은 진정한 승리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경쟁의 승리가 곧 성공이나 물질적 보상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마지막 대통령배 수영시합에서 준호는 그동안의 수영이 아니라 새벽에 빛을 따라 수영했을 때처럼 누구보다 자유롭게 수영한다. 레인을 가로로 건너듯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수영하는 것처럼 수영한다. 등수는 보이지 않고 주변의 사람도 눈에 차지 않는다. 그러한 자유 속에서야 아이는 승리를 쟁취한다.
4등은 경쟁에 지친 우리 현대인들에게 보내는 위로와도 같다. 20대의 대부분도 아마 학창시절 체벌을 겪었을 것이다. 우리 일상 속에서 교육을 빙자한 폭력이 사라진 건 몇년 안되었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폭력을 문제와 경쟁의 해결책으로 본다. 내내 엄마의 말에 따르던 준호는 결국 ‘엄마는 내가 맞으면서도 1등을 했으면 좋겠어?’라며 묻는다. 준호가 영화에서 처음으로 던지는 질문은 엄마뿐만 아니라 경쟁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에 묻는 것같기도 하다. 좋아하는 것을 잃은채 얻어낸 성취에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아이는 폭력적인 어른들을 모두 떨쳐내고 나서야 홀로선다. 홀로서기를 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지만 아이는 언젠가는 어른이 될 것이고 어떤 어른이 될 것인지는 우리 사회와 어른들의 역할이다. 이런 치열함 속에서도 진정한 어른이 된 사람들에게는 장하는 격려를, 아직도 이유조차 모른채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유로움을, 경쟁 속에서 지쳐버린 사람들에겐 따뜻한 위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