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삶 : 둘 사이 균형

워라밸 : 균형이 아닌 조화의 기술

by SW짱

"홍 과장, 내일 토요일인데 출근 가능하죠?"

금요일 저녁 6시, 퇴근 직전 타 부서 전화였다. 나의 팀장은 아니지만 중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것을 알고 있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나 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나도 알고 있기에 거절할 수 없었지만 아내와 아이 돌잔치 사진을 정리하기로 약속한 주말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대답했지만, 집에 도착해 아내에게 말을 꺼내는 것조차 두려웠다. 아내가 결혼 초기부터 전세집 구하기, 이사 준비 등 집안 업무 관련된 것부터 아이까지 챙기면서 회사생활도 병행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날 밤 아내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직장 생활 초기, 나에게 워라밸이란 단어는 사치였다. 신입 시절 선배들이 밤 10시까지 남아있으면 나는 11시까지 있었다. 회사에서 숙식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주말 출근도 당연했고, 휴가도 눈치가 보여 쓰지 못했다. '지금 열심히 하면 나중에 편해지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로 버텼다. 하지만 과장이 되고, 차장이 되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책임은 무거워지고 업무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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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의 신호들


직장 10년 차 어느 월요일 아침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고, 회사에 갈 생각만 하면 숨이 막혔다. 알 수 없는 무력감과 우울증마저 생긴 듯 했다. 병원에 가지는 않았지만 회사에 있는 시간이 짜증과 나에게 대해 사람들이 험담을 한다는 상상에 휩싸여 있었다. 더구나 그 시기에 허리 디스크 증세가 나타났다. 자리에 앉아 있지 못했고 세상 모든 일이 하기 싫어졌다.

문제는 주변 사람에게 나의 스트레스성 말투가 공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회사의 후배들도 힘들어 했지만 선배들에게도 대들기 시작했고,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아내와의 다툼이 잦았다는 것이다. 아내와의 감정적 골은 점점 심해지면서 대화의 시간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외톨이가 된 듯 했고 나의 억울함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나 스스로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병원에서 진단은 받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우울증 증세를 앓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이 무너지는 구나.'


일과 삶의 균형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내가 쓰러지면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 가족도, 일도, 나 자신도 말이다. 2주간 휴가를 받고 쉬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일에 매달렸을까?

마치 내가 없으면 회사가 안 될 것 처럼 보였다. 그런데, 회사는 내가 없어도 돌아가고 있었다. 조금 불편함이 있을지 모르지만, 해결책은 나온다. 하지만 나에게는 나밖에 없다. 내가 없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필요가 없다.



"이동 중입니다"라는 답장


"이동 중입니다"는 이전 회사에서 양산 장비 유지보수를 맡았을 때 가장 많이 하던 문자 답장이다.

내가 하고 있는 업무의 특성 상 주말에도 콜을 받았기 때문에 아내와 나들이나 쇼핑 중에도 항상 귀에는 전화기를 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주말인데 왜 쉬지 못하니? 그 사람들도 주말에는 전화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모르는 거야?"

그들은 생산직이라 3교대로 24시간 근무하지만 아내는 그런 산업계의 운영방법을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난 아내의 말에 내가 조금이라도 나를 위해 시간을 가지고 있었나, 가족을 위해 다른 생각을 내려놓은 적이 있었는가 생각을 해 보았다. 돌이켜보면 머릿속에 회사 일만 생각하고 있었고 아내와 대화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나는 조금씩 생활에 작은 변화들을 시도했다. 일단, 조금이라도 나만의 시간을 가지려 했다. 매일 항상 바쁜 일과였지만 점심식사 후 30분 정도의 쉬는 시간에 독서를 하기로 했다. 10분이라도 괜찮았다. 이 시간을 나를 위한 시간으로 정했다. 처음에는 상사의 눈치가 보였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은 조금 더 편안해 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일로 가득한 머릿속에 새로운 생각들이 대체해 주는 것 같았다.


명확한 업무 시간 내에 집중하니 생산성이 높아졌고, 퇴근 후에는 가능한 잠시 회사일을 내려 놓기로 했다.

점심시간에는 회사 근처 체육관에서 30분 운동하기. 재택근무 날 저녁은 꼭 가족과 함께 식사 하기. 업무 중간 10분씩 산책하기. 금요일 저녁에는 업무 메일 확인하지 않기. 이런 작은 원칙들이 쌓이면서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편해야 일도 잘된다."

- 법정 스님 -


대리 시절 함께 근무하던 김 대리가 있었다. 그는 항상 정시 퇴근을 했다. 주말에는 절대 일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저 사람은 의욕이 없나'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업무 성과는 우리 팀에서 최고였다. 비결이 뭐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100% 집중합니다. 딴짓 안 하고, 잡담 안 하고, 오직 업무만 합니다. 대신 퇴근하면 일 생각 안 합니다. 완전히 끊습니다. 그래야 다음날 또 100%로 집중할 수 있거든요."

그의 말이 맞았다. 야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낮 시간에 집중하지 못한다. 담배 피우러 나가고, 커피 타러 가고, 유튜브 보고, 잡담하다가 저녁이 되면 "일이 안 끝났네"라며 야근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열심히 일한다'고 착각한다.

나 역시 그랬다. 낮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시간만 때우다가 저녁에 허겁지겁 일하고, 그것을 '성실함'이라고 포장했다.


교훈: 시간이 아니라 집중이다. 8시간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12시간 흘려보내는 것보다 훨씬 생산적이다.



워라밸이 아니라 워라블렌딩


차장이 되고 나서 깨달았다. 일과 삶을 완전히 분리하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는 것을. 때로는 저녁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주말에 업무 관련 책을 읽으면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 반대로 평일 오후에 개인 용무를 보기도 하고, 점심시간에 가족과 통화하기도 한다.

중요한 건 '분리'가 아니라 '조화'였다. 일과 삶이 서로를 해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섞이는 것. 그것이 진짜 워라블렌딩(Work-Life Blending)이다.

어떤 날은 일이 70%이고, 어떤 날은 삶이 70%다. 그게 자연스러운 거다. 프로젝트 막판에는 주말 근무도 한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면 보상 휴가를 쓰거나 재택근무를 늘려 균형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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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가 된 지금


이제 나는 이사가 되었다.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6시 되면 퇴근해. 급한 일 아니면 내일 해도 돼." 처음에는 눈치 보던 후배들도 점차 변화했다. 팀 분위기도 좋아졌고, 이직률도 현저히 낮아졌다.

물론 여전히 야근이 필요한 날도 있다. 중요한 건 그것이 '일상'이 아닌 '특별한 상황'이라는 점이다. 예외가 원칙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번은 후배가 물었다.

"이사님, 워라밸 좋은 회사로 이직하고 싶은데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나는 이렇게 답했다.

"워라밸은 회사가 주는 게 아니야. 스스로 만드는 거지. 어떤 회사를 가든 네가 경계를 만들지 않으면 일은 끝없이 늘어나. 반대로 네가 명확한 원칙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회사에서든 균형을 찾을 수 있어."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마지막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

- 빅터 프랭클 -


이 말은 워라밸에도 적용된다. 회사가 야근 문화를 강요할지라도, 그 안에서 나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 물론 회사 생활은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동료에 의해 일이 어려움에 처하기도 한다. 그리고 계획했던 개인의 삶이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러면서 나의 시간의 소중함과 알차게 보내는 방법을 깨달게 된다.

선택은 항상 우리에게 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선택을 두려워할 뿐이다.



몸이 보내는 신호


50대 부장님이 갑자기 쓰러진 적이 있었다. 과로로 인한 심근경색이었다. 다행히 무사했지만,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20년 동안 회사 위해 내 몸 혹사시켰는데, 정작 회사는 내가 쓰러지자 대체 인력 찾더라고. 그때 깨달았어. 나는 회사에 절대적이지 않지만, 내 가족에게는 절대적이구나."

우리 몸은 신호를 보낸다. 계속되는 피로, 수면 장애, 두통, 소화불량. 이런 신호를 무시하면 언젠가 큰 대가를 치른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

돈은 또 벌 수 있지만, 건강은 되돌릴 수 없다. 승진은 다음 기회가 있지만, 가족과의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지속 가능한 직장생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워라밸이 필요하다.



회사는 나의 전부가 아니다


이 말을 하면 누군가는 "그럼 성공 못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성공이 뭔가? 임원이 되는 것? 연봉 1억? 그것을 위해 건강과 가족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게 진짜 성공인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 회사 업무를 한다고. 조금 아이러니 한 말이다.


지금 나의 생각은 다르다. 회사를 위해 일을 하기 보다는 평생 써먹을 수 있는 커리어를 쌓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은퇴하더라도 나의 지식을 누구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가치로 만들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큰 자산이 될 수 있는 멘토가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에게 성공은 80세에도 건강하게 걸을 수 있는 것, 가족과 편안한 저녁을 먹는 것, 아침에 일어났을 때 출근이 두렵지 않은 것이다.

완벽한 균형은 없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조절하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한쪽으로 계속 기울지 않도록 스스로를 돌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워라밸이다.

당신의 몸과 마음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지 마라. 그것이 당신을 지키는 첫 번째 방법이다. 회사는 당신이 없어도 돌아가지만, 당신의 인생은 당신만이 책임질 수 있다.

나는 후배들에게 항상 말한다.


"일도 중요하지만, 네 인생은 더 중요해. 너를 빛낼 수 있는 경력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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