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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풀생각 Jul 16. 2023

독서에 관한 자기 결정권


오래전에 어느 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회사 같은 곳에서 나 같은 사람에게 원하지 않는 독서토론 모임의 참여를 강요하고 추천도서 목록을 제시하여 독후감을 쓰게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만약, 헌법상 기본권에 독서에 관한 자기 결정권이 들어 있다면, 이 행위들은 그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


​​이 글은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보장하지 않았으나 그렇게 믿고 싶은 독서에 관한 자기 결정권에 대해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지키기 위한 어느 직장인(A)의 당당한 맞섬의 본보기를 억지로 꾸며낸 것입니다.


이야기에 앞서, 헌법상 자기 결정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기 결정권(自己決定權)이란 대한민국 헌법상의 권리로 국가권력으로부터 간섭 없이 일정한 사적 사항에 관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의적 권리를 뜻한다.

​법률적 근거로는 헌법 제10조(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기본적 인권보장)가 보장하고 있는 개인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에 전제된 개인의 자기 운명 결정권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성적 자기 결정권과 생명·신체의 처분에 대한 결정권 및 피임 결정권 등이 있다.

헌법이 기본적 권리이므로 존중되어야 하며, 타인의 자기 결정권 역시 존중해야 한다.  




어느 회사의 한 부서에서 부서장의 뜻에 따라 독서토론 모임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독서토론의 목적은 부서원들의 발표력과 글쓰기 능력 향상이다. (물론, 표면상의 이유다.)

​매주 금요일 아침 8시에서 8시 30분까지, 부서장을 포함한 5명 부서원 모두가 참여한다. 한 명씩 번갈아 가며 발표자가 되어 토론할 책을 정한다. 발표자가 임의로 고른 책을 다 같이 읽고 발표를 끝낸 후 토론 한다.


그러나, 독서토론의 ​본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그 부서의 업무를 해본 적이 없는 부서장이 부서원들을 업무 지휘능력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통제하려고 이 모임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 근거로는 ‘부서장은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자주 쓰는 부서에서 오래 근무를 했다. 그래서, 독서에 있어서는 회사 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자기 과시를 통한 고도의 지적 통제전략이다.’이다.


※ 위의 추정이 사실이 아닐 경우, 자기 이행적 예언의 일종인 확증 편향적(confirmation bias or myside bias) 태도로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일 수도 있음


민법상 추정은 어떤 사항과 동일한지의 여부가 불확실한 다른 사항을 일정한 법령이나 규정의 관계에서는 서로 동일하다고 취급하여 최초의 사항에서 발생한 법적 효과를 다른 사항에 대하여도 발생시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추정은 일정한 사실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에 보통의 상태를 기준으로 하여 일단 사실을 가정하고 거기에 일정한 법적 효과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추정은 입증을 기다리지 않고 사실을 가정(假定) 하는 것이므로, 이와 다른 사실을 주장하는 자는 반증을 들어 증명하면 언제나 추정을 전복(顚覆) 할 수 있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부서원들은 아무런 말 없이 그가 하자는 대로 따르기로 한다. 요즘이라면 바로 블라인드 앱에 올라갔을 텐데. 스크린 골프와 술 먹느라고 졸업 후 책을 거의 읽지 않았던 부서원들 모두 고통스러워한다.


​​각자가 순번을 정해 번갈아 발표를 한다. 주요 관심 분야는 소설, 자기 계발서, 역사(철학), 주식투자 그리고 힐링 서적으로 가지가지다. 전 부서원이 돌아가며 발표를 끝내는 데 딱 1달이 걸린다.


그들 가운데 대표이사가 추천하는 도서라든지 교보문고 베스트셀러라고 누가 강제로 읽어보라 하면 넌더리를 내는 A가 있다. 그는 회사밖에서는 어디서든지 제 맘대로 스스로 알아서 책을 보는 독서 자유인이다.


​​평소 A는 이런 형태의 독서와 토론을 지긋지긋하게 몹시 싫어했다. 왜냐하면, A는 근로기준법을 바탕으로 마련한 회사의 취업규칙에서 규정한 근로시간에 업무 목적과 동떨어진 독서 토론을 한다는 자체가 회사에 대한 근로자의 의무 불이행이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헌법에서는 보장하지 않았으나 그렇게 믿고 싶은 독서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박탈당하는 것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가 반강제적으로 읽고 독후감을 써라고 하는 추천도서의 목록 제시는 너무도 싫어한다. 이 여파로 그는 그런 시절이 모두 지나갔음에도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목록은 쳐다도 안 본다고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왕 할 거라면 회사의 직무개선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독서토론을 하자는 것이다. 물론, 발표력 향상과 글쓰기 능력의 개선과 같은 추상적인 목적을 가진 모임이라면, 취향이 비슷한 사람끼리의 독서 모임에 권장할 사안이다. 그래서 동호회도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가?’ 한다.


​​아무튼, A처럼 독서에 관한 관심분야가 일반인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사람에게는 이런 유형의 모임이 고역 아닌 고역일 것이다. 글을 쓰는 나도 A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는다.


만약 나라면 조직이 그냥 시키는 대로 따랐을 텐데 A는 대단하구나!


​소문에 의하면, A는 자기와 독서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회사에서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어쨌든, 대놓고 말을 못 해서 그렇지 다른 부서원들도 A와 비슷한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모두 간파한 A가 꾀를 하나 내기로 한다.


​독서토론을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침 회의 시간이다. 그다음 달에 토론할 주제의 도서를 선정하는 데 A가 갑자기 큰 소리로 또박또박하게 의견을 낸다.


​부서장이 하자는 대로 독서 토론을 한 달 이상을 해봤는데 비효율적이다. 그래서 부서 업무와 연관성이 아주 높은 책을 한 권을 선정해서 파트별로 나누어 읽는 부분을 발표하고 모르는 것은 서로 토론하는 것이 좋겠다.

​교재는 양창수 교수의 ‘민법 입문’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이 책은 전체 5장으로 나누어져 각자가 한 파트씩 맡기로 했다. 내용은 제1장: 계약의 원만한 진행, 제2장: 소유권, 제3장: 계약의 효력 불발생, 제4장: 채무불이행, 제5장: 채권담보다.​

방식은 일단 제1장을 각자가 모두 읽어와서 발표자의 주재로 모르는 내용은 서로 질문하고 답한다.
물론, 내용이 어려워 토론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함께 읽으면 최소한 1회라도 정독을 해보자는 의도라고 말한다.


​그 자리에서 제비 뽑기를 하여 발표를 맡을 부분을 정하자고 한다. ​독서 토론에 불만이지만 ‘할많하않’ 던 부서원들이 갑작스러운 A의 제안에 모두가 찬성해서 그의 제안대로 진행되었다.


​​사실 A는 그 책의 내용이 어렵고 또 재미도 없어서 모두 제풀에 나가자빠지기를 기대하며 생각해 낸 꾀였다. 혹여라도 계획에 차질이 생겨 모두 다 열공한다고 해도 어려운 민법 입문을 다 같이 정독을 하는 효과가 있으므로 큰 무리는 없었다.


​​다행히, A의 뜻대로 일이 잘 풀렸다고 한다.


​처음에 시작한 사람이 너무 어려워 해당 파트를 10분의 1도 읽지 못했다 한다. 그래서 1주일을 연기했는데 또 못 읽었다 한다. 그러다가 부서에 다른 중요한 일이 생겨 흐지부지되더니 결국은 독서 토론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날 이후부터 그 부서사람들은 다시는 독서(讀書)의 독(讀) 자를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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