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가훈은 ‘없이 살지 말자!‘다.
지난 토요일에 63 뷔페 파빌리온에서 점심을 먹었다. 한 명당 들어간 돈은 140,000원이었다. 물론, 에누리를 해서 조금 덜 냈다. 돈을 아끼려고 평일에 가자는 것을 뿌리치고 그냥 하자고 했다. 가훈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함께 간 식구들이 모두 즐거워해서 나도 기뻤다. 작년에 가족 모두가 싱가포르를 다녀오고 난 후 가진 첫 나들이었다. 성년인 아들이 우리와 잘 놀아 주지 않는다. 내친김에 63스퀘어 전망대에서 펼쳐 놓은 막스 달튼 전시회도 구경했다. 예술에 문외한이라 별 감흥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있기도 머쓱해서 아는 척 고개만 끄덕이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전망대에서 서울의 동서남북을 모두 훑어보며 내가 서있는 지금•여기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우리 가족은 보통 때 조용하다가 한 번씩 이렇게 움직인다. 우리 집 가훈은 나 말고 아무도 모른다. 여러 번 얘기를 했는데, 좀 없어 보이는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굳이 가훈이라고 벽에 붙여 놓지 않더라도 우리 식구는 모두 그렇게 하고 산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가진 것이 없다고 볼멘소리를 할 까닭이 없다. 매우 흐뭇하다.
꽤 오래전 일이다.
보통 회사에서 매주 월요일에 동료들끼리 인사치레로 주말에 무엇을 했는지 묻곤 한다. 나는 모든 일상이 프로그램으로 꽉 짜여 있기 때문에 하는 일이 정해져 있다. 가령, 남들이 내게 노는 날 어떻게 보냈는지 물으면 운동하고 화장실 청소하고 책 읽고 설거지했다고 대답한다. 늘 뻔한 대답이라 내게 그런 건 잘 묻지 않는다.
한 번쯤은 이번 주는 무슨 책을 읽었냐고 물어봄 직도 한데...
늘 같은 대답을 하던 어느 날, A가 나한테 ‘매우 단조롭게 사시네. 매우 재미없는 삶일쎄’라 빈정댄다. 그러면서, 자기는 친구들과 스크린 골프도 치고 술도 먹었을 뿐만 아니라 토요일엔 아들과 함께 캠핑을 다녀왔다고 한다. 늘 매우 힘찬 삶을 산다고 으스댄다.
그래서 내가 A한테 좀 더 자세히 물어본다.
골프는 매주 만나는 멤버들과 함께 쳤고, 캠핑은 늘 같은 곳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가리지 않고 다녀온다고 한다.
나는 또,
산과 강 그리고 이곳저곳을 모두 돌아다니고 또 이 사람 저 사람과 함께 어울리기 때문에 매우 역동적인 생활을 한다고 하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나와 도긴개긴이구먼.
나는 늘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한 삶을 산다 하고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내가 2주 만에 회사를 나가게 되었다. A가 나를 보더니 매우 반가워하며 무슨 일이 있었냐고 한다. 그래서 내가 틀에 박힌 삶을 벗어나려고 서유럽 여행을 다녀왔다고 거드름 피운다.
가족 여행인데 돈을 좀 썼다고 말한다. 가족이 나보다 많은 그가 매우 부러워하는 눈치다. 속으로 내가 맨날 책만 보고 여행 같은 건 안 하는 줄 안 모양이다. A는 내가 작년에 큰돈 들여 싱가포르에도 다녀왔을 때도 많이 놀라기는 했다.
왜 안 그러하겠는가!
허구한 날 집구석에 박혀 책만 보는 사람이 한 번씩 큰 사고를 치니 말이다. 한말로 굵고 짧게 산다. 솔직히 말하면, 책 보는 것도 매우 힘차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일이다. 얼을 한 곳에 모아야 하는 고도의 마음가짐과 끈기 그리고 끊임없는 생각 틀 짜기…
몇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나면 힘을 쏟는 일 가운데 웬만한 바깥 활동을 견줄 수가 없다.
가령, 이번에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어 보고 또 다음에는 헤겔의 정신 현상학 그리고 그다음에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를 보며 더욱더 어려운 순서로 책을 읽는다. 또 소설과 사회과학 그리고 역사와 철학을 넘나들며 매우 복잡한 길을 다닌다.
그런데 이런 고도의 정신적인 생산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자기 맘대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 단조롭다며 재고 잘라버린다. 그러니 속으로 참 단순한 사람이라고 밖에 볼 수 없지 않을까?
이번 주말엔 또 톰 크루즈의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을 보러 가야겠다. 그리고 김태리 주연의 악귀도 챙겨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