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목요일과 금요일엔 술을 좀 마셨다. 이틀 모두 같은 회사를 다니며 친해진 선배와 친구 그리고 후배와의 만남이다. 1964년에서 1974년 사이에 태어난 남자 셋과 여자 한 명을 만났다.
나는 한자리에 딱 세 명이 모이면 절친 그룹이라 일컫는다. 각박한 경쟁 사회의 직장 조직에서 나에게 이런 모임이 많다고 자랑하는 것은 내 성격이 까칠하거나 못나서 책만 읽고 사는 외톨이가 아님을 나타내고 싶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모임이 더 있는데, 이 가운데 하나는 학구파들로 이루어진 시사와 인문학 토론 장이다.
다시 한번 나는 사회적 관계를 바탕으로 개인적 자유를 만끽할 때 행복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두 모임에서 나온 대화의 공통적인 결론은,
벽에 붙은 담쟁이나 길바닥에 딱 붙은 비에 젖은 낙엽처럼 정년까지 오래 버티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일단 인간 생활의 불편을 초래하지 않고 또 하수구 같은 곳을 막지 말고 배수가 잘 되도록 처신을 잘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이라는 저 알량한 세상 편한 겉치레 이론인 공리주의(Uutilitarianism)를 맹신하는 힘 있는 젊은 세력들이 작당해서 담쟁이넝쿨을 제거하고 낙엽을 쓸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눈치껏 요령껏 잘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
지금처럼 늘 새로움을 찾아다니며 뒤따라오는 젊은 사람들이 혹여라도 길을 물어 올라치면 내가 겪은 일을 잘 알려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지.
내가 늘 걷고 달리는 길 옆벽엔 담쟁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그 길바닥엔 낙엽이 떨어졌다. 그리고 지난밤에 내린 비로 낙엽이 물기에 젖고 사람과 동물들에게 이리저리 밟혀 너절너절 볼품이 없다. 그런데 둘 다 오래 살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떨어진 나뭇잎을 보며 쓸쓸한 가을을 노래하나 보다.
그러나, 감정이 메마르고 반골 기질이 뼛속까지 깃든 내 생각은 아주 다르다.
그토록 무덥던 여름도 우리 곁을 떠나고 가을이 소리 없이 나뭇잎을 앞세우고 다가왔다. 잘은 모르지만 잎은 이산화탄소와 물, 햇빛을 이용해 영양분과 산소를 만드는 광합성 작용을 해서 식물이 호흡을 하여 잘 자라게 만들었고 또 이 식물은 생물이 잘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큰 노릇을 마치고 이제 자기 갈 길을 가는 것이다.
낙엽이 떨어져 쌓이고, 흩어져, 마침내 사라져 버리는 과정을 가을의 쓸쓸함, 외로움, 초라함, 쇠락과 죽음 또는 끝남으로 봐서는 안된다. 이와는 다르게, 자비희사(慈悲喜捨)와 사랑 그리고 인간다움(仁)이 어우러져 존 롤즈가 정의론에서 주장한 상호 무관심한 합리성(Mutually Disinterested Rationality)이 바탕이 된 이타심(Altruism)으로 승화시켜 또 다른 설렘이 되는 그런 날로 봐야 한다.
조금 더 달려가니 젊고 건장한 근육질의 남자가 힘차게 달려 나온다. 보는 것만 해도 힘이 솟구친다.
곧이어 따라오시는 80대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으며 겨우겨우 걸음을 해 오신다. 몸이 아주 불편하신 듯하다. 내가 세 바퀴 도는 동안 반 바퀴도 못 움직이신다. 그 뒤를 이어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도 계시고 또 몇 걸음 뒤에는 곱사등 할아버지 그리고 몸 어딘가를 수술한 듯 엉거주춤 걸어오는 내 또래 아주머니…
모두 모두 아침 운동을 하는가 보다. 하나같이 몸은 힘들고 괴로워 보이지만 얼굴이 밝고 눈이 빛난다. 희망의 불꽃같다. 그래서 더욱더 설렌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고 뉘우친 사람들 거의 다가 ‘젊은 날의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부르짖었을 텐데… 자식을 가족을 사회를 국가를 위해 온몸을 불사르며 한 여름의 나뭇잎처럼 나무의 뿌리와 줄기와 열매를 위해 자기 힘을 다 바쳤을 텐데.
비에 젖은 가을 낙엽을 막 마주하고 사색에 잠긴 터라 노익장을 비롯한 어르신들의 모습이 한층 더 존경스러워 보인다. 좀 전에 젊은이 옆에서 없어 보이지 않으려고 허리를 쫙 펴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지만 나이 드신 인생의 대 선배님들께는 길바닥에 납작 엎드려 예를 갖추고 싶어 진다.
느닷없이 책 어디선가 본 Understand의 어원이 떠오른다. Under(아래,~아래의) + Stand(서다, 서있다)가 만나서 Understand라고 하더만.
그 뜻은 아래에 서있다는 것으로 아래에 서면 겸손하게 상대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해라는 것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자만이나 내가 다 맞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고, 아래에 서서 겸손하게 상대를 바라보며 따뜻한 이해를 넘어 존경의 마음을 가져야 보일 듯하다.
오늘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 (上善若水)를 되뇌고 싶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는 물의 성질을 최고의 이상적인 경지로 삼는 도가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