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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풀생각 Jan 08. 2024

인생길의 결빙구간(結氷區間)


토요일 밤 9시 즈음에, 시청에서 보낸 안전 안내 문자를 받았다.

그 내용은 ‘주요 도로 제설 중 교량구간 등 결빙 우려되오니 안전거리 유지 및 감속 운전을 바랍니다!’이다. 눈이 내리나 보다. 올겨울에 눈이 자주 오네.




결빙구간은 추위로 바닥에 얼음이 생길 수 있어서 조심해야 하는 곳이다.

간밤에 눈이 조금 온 모양이다. 그리고 어제 날씨와 견주어 바깥 온도가 푹 내려간 듯하다.

그렇다고 일요일 아침 루틴을 포기할 수는 없다. 옷을 모두 챙겨 입고 문밖으로 나선다. 도로가 얼어붙어 매우 미끄럽다. 조깅화를 신어서 더욱더 그런 듯하다. 걸음마를 겨우 뗀 어린애 마냥 엉거주춤하게 걷는다. 자세를 낮출수록 더 삐걱거린다.

작년보다 생각이 많아져 크게 앞으로 달려 나가지 못한다. 괜스레 객기를 부리며 달려 나가다간 정형외과나 한의원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 몇 주간은 달리기를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가 여러 가지로 불편하게 될 것이다. ​


이런저런 생각 끝에 안전 안내 문자를 떠올린다.

연말에 울진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구간에 폭설이 내렸다. 눈이 너무 많이 내리며 바람까지 세게 불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날씨까지 추워 도로가 금방 얼어붙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며 비상등을 켜고 속도를 최대한 낮춰 안전 운전을 했다. 그때도 도로 전광판에는 붉은 글씨로 ‘결빙 구간이오니 속도를 줄이세요!’가 쓰여있었다.

안내에 따라 속도를 확 줄이고 차를 몰았더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을 뿐이었다. 어차피 목표점은 정해졌고 집에 가서 특별히 해야 할 중요한 일도 없었기에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바깥의 설경을 즐기며 천천히 올라왔다. 평창 휴게소에 들러 사진도 찍고 커피를 마시며 호두과자도 사 왔다.

이날의 기억을 되살려 원래 하던 자세, 곧 하늘에서 상투를 잡아당긴다는 느낌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하체를 최대한 가벼이 하며 전방을 주시하며 천천히 달려 나갔다. 이번에도 대관령을 넘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넘어지거나 미끄러지는 일 없었다.


다시 말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운동을 끝내고 스타벅스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만 조금 더 걸렸을 뿐이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집에서도 책 보는 것 빼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던 터라 서두를 일이 전혀 없었다. 말 그대로 즐기며 운동을 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


50대 중반에 들어선 지금 주변에 내 또래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연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거나 병원 신세를 지거나 회사를 그만두거나 하며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양이다. 눈 위에 서리까지 덮여 눈도 잘 안 보이고 귀도 잘 안 들리고 허리도 무릎도 마음대로 잘 안 움직인다고 한다.

그야말로 인생길의 결빙 구간이다. 이럴 때일수록 가야 할 곳과 길 그리고 길을 잘 헤쳐나갈 솜씨와 꾀를 잘 갖추어 놔야 한다.


이런 걸 잘 그리고 많이 만들라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가 보다. 나는 말도 안 되는 큰 사람이 되는 꿈을 세웠고 그 길을 가기 위해 영어와 철학과 법학을 도구로 삼아 죽을 때까지 밥벌이할 일을 하나씩 만들고 있다. 내가 좋아하고 즐기며 작지만 돈벌이도 될 만한 일을 찾아 그저 그 길로 실력을 쌓으며 묵묵히 가기만 하련다.

절대 서두를 일이 아니다!

그냥 목표점을 향해 속도만 늦추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나아가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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