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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풀생각 Feb 02. 2024

전문성, 창의성, 그리고 인간성


소비자보호실로 발령 난 지 어느덧 두 달이 된다. 기업에서 고객 관련 이슈들을 전담하고 책임지는 임원급 직책인 CCO(Chief Customer Officer)가 1월 중순에 부임함에 따라 조직이 모두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회사에서 짬밥을 먹은 횟수가 늘어나서 그런지 옛날과 달리 평판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쓴다. 물론, 잘 보여서 점수를 따려는 게 아니라 밉보이게 될까 바다.

이 나이에 업무 평가점수가 높으면 어떻고 낮으면 또 어떠냐! 딱히, 더 올라갈 데도 없고 내려갈 일만 남았는데. 등산은 올라갈 때 보다 내려갈 때 사고가 더 많이 나는 법이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겠다. 슬슬 내려가 등산로 입구에 있는 허름한 음식점에 들어가 동동주나 한 사발 들이켜야겠다. ​


업무야 예전에 하던 것이고 TFT 기간 동안 민법과 민사소송법 그리고 행정법과 형법의 이론 체계를 정리해 놓은 터라 업무 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부서원들 가운데 세명만 조금 알고 나머지는 깊이 있게 몰라 모두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가급적 회사 업무 말고는 냉정할 정도로 적당하게 거리를 두고 지낸다. 혹시 모를 오해로 서로 간의 마찰을 우려해서다.

소설 ‘Pride and Prejudice’의 Fitzwilliam Darcy를 들먹거릴 일 까지는 아니다. 그래도 이 소설 정도는 읽었음을 티 내기 위해 인용한다.


그는 소설의 주요 남자 주인공이자 28살의 독신자로, 빙리 씨의 친한 친구이자 엄청난 재산을 가진 신사이다. 키가 훤칠하고 잘생겼으며 예의 바른 태도를 갖추었다. 하지만 거만하고 차가운 듯한 성격으로 좋은 첫인상을 주는 사람은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존경받고, 사실은 마음이 깊고 배려가 많다.

​그래서 Elizabeth Bennet이 오해를 한다.

​(이하 생략…)


회사에 남들보다 30분 일찍 출근해서 Starbucks에 들러 Siren Order로 주문한 커피를 들고 내 자리로 간다. 그리고, Financial Times를 본다. 부서원들 가운데 나보다 선배인 두 분이 비슷한 시간에 서로 인사를 나눈다.

공식적인 출근 시간(08:00) 이후에는 신문을 점심때에 다시 만나자고 인사하며 가방에 넣는다. 그런 다음에 최근 접수된 민원의 쟁점 파악을 끝내고 이론 구성을 위해 민법 교과서를 펼친다. 금융감독원 또는 민원인에게 제출할 사실조회 답변서를 작성하기 위해서다.

이론 구성은 아래의 내용, 곧 판결문 정독 요령에 따라 창의적인 방법으로 최대한 논리 정연하고 간결하게 작성한다.


사실관계,  원고 또는 신청인이 그 소송 또는 분쟁에서 종국적으로 청구하는 바와 그 청구의 법적 원인,  판결 또는 결정에서 문제 된 법적 쟁점,  그에 대한 대법원 또는 금융분쟁 조정위원회의 판단과 그 이유, 그리고  사건의 최종 결말


최근에 내가 맡은 민원 업무의 핵심 쟁점은 재산적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는데도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가와 주문대리인 계약 체결 과정에서 발생한 무권대리행위의 범위와 효과 그리고 펀드의 매매계약을 착오를 이유로 취소할 때 필요한 법리 요건이 무엇인지 따위다. 이 내용들을 민법 조문을 바탕으로 해당 사건을 해석하고 적용하며 이론 구성을 해서 사실조회 답변서를 작성하여 부서원들과 회의 시간에 공유한다.

업무시간에는 업무처리와 관련하여 민원인 또는 직원 그리고 금융감독원 담당자와 대화를 할 때 빼고는 일체 대화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잠시 쉬거나 점심 또는 퇴근시간에 동료들을 만났을 때는 헛소리도 많이 하며 활짝 웃고 즐긴다. 집에 돌아가면 그분이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 회사에서 과묵하게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며 자주 놀린다. 집에서는 말 그대로 자연인처럼 산다.

비록, 다른 사람들, 특히 MZ 세대들과 견주어 단순한 타자 속도나 자료의 전산조회와 같이 순발력은 많이 떨어지지만 오랜 시간의 내공이 쌓인 깊이 있는 법률 지식과 실제 사건의 응용분야는 그들이 감히 넘나 보지 못할 수준으로 만드는데 온 힘을 다 쏟아붓는다. 이런 것이 바로 MZ 세대들 사이에서 나를 함부로 꼰대라 부르지 못하게 하는 비결임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이리로 오고 나서 부서의 일부 직원들은 많이 놀란 모양이다.

몇 가지를 추려보면,

효율적 민원의 처리는 ‘상당한 법률 지식을 바탕으로 이해당사자들과 원활한 소통을 할 줄 알아야 하고,

변론주의 『본안판결을 목적으로 하는 소송자료(사실과 증거)의 제출은 당사자들에게 일임하여 법원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뜻하는 개념』 를 염두에 두고 전문적이고 창의적인 서면 답변서를 쓸 줄도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말을 정확하고 간결히 논리 정연하게 자신감을 가지고 상대방을 설득하는 게 필수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 듯하다.

혹시라도 여태껏 눈치가 없어 저것들을 몰랐으면 이제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담당자가 자기가 할 업무를 주체성을 갖고 주무 부서 특히 법무부서의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한 사항에 대하여 사실관계를 기반으로 한 질의 사항을 보내고, 변호사나 세무사 등과 머리를 맞대고 전문 지식을 나누며 답변서 작성 전략을 짜는 것이 매우 신선했던 모양이다. 사실 변호사들은 고객이나 직원과 마주하며 부대끼는 일을 혐오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일에 다리 노릇을 하는 일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또한, 주간업무 회의 때 복잡하고 난해한 사례를 관련 법리를 적용하며 간결하게 발표하는 게 신기하기까지 한 모양이다.

(솔직히 이럴 때 이런 곳에서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려고 브런치나 블로그를 운영한다.)

앞으로도 내가 맡은 일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창의성을 보태고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그런 전략을 나란히 해서 나도 모르게 여기저기서 생기는 조그마한 꼰대 짓거리들을 객관적인 실력으로 모조리 덮을 생각이다. 아무튼,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들어온 이상 기존의 틀을 깨뜨리지 않고 품위를 유지하며 자존감이 우뚝 설 수 있도록 처신을 잘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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