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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풀생각 Jan 20. 2024

나의 전공; 금융분쟁조정학


누가 나에게 전공을 물어오면 대놓고 ‘금융분쟁조정학’이라고 말한다.

전공이란, 한 개인이 어떤 자격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론적•실제적인 면에 걸쳐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학문분야다. 이 용어는, 교육학 용어 사전에 들어 있을 리도 없고 네이버(Naver)에 찾아봐야 헛고생이다. 왜냐하면 내가 새로 만든 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규정한 까닭은,

29년 이상을 금융회사에 근무하고 그 가운데 11년 넘게 금융분쟁조정(민원) 업무를 맡으며 실무 또는 실습을 하고 있으며,

​민법과 형법과 행정법 그리고 민사소송법 따위를 전공필수로 업무와 관련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고전을 전공선택으로,

시사영어를 교양과목으로 하여 이론 공부를 끊임없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담당 교수는 나를 둘러싼 모든 스스로 그러한 것들(自然), 곧 ‘사람, 동물 그리고 식물 따위’이며 수료 조건은 내가 다른 일을 맡게 될 경우뿐이다.




요즘 회사 게시판에는 작년 말에 회사에 들어온 신입 직원들의 소개가 날마다 올라온다. 거의 모두 회사의 한 일원으로 전공을 잘 살려 맡은 분야의 전문가가 되겠다는 포부로 자기소개를 한다.

이들을 보니 그 옛날 애송이 때 내가 떠오른다. 그리고 소리 없이 씩 웃는다. 그때는 영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금융 투자회사에 걸맞게 경제학(금융론)이나 경영학(투자론) 또는 법학(민법)을 빨리 배워 금융자산관리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신입 OJT 시절 담당 대리로부터 채권 가격을 계산할 줄도 모르는 영문학도가 왜 이런 곳에 들어왔느냐며 날마다 핀잔을 들었다. 입사 동기들 대부분이 경영학(회계학)과 법학 그리고 행정학과 같은 전공자였고 선배들 역시 대부분 그런 유의 직장인들이었다. 입사 후 몇 개월간은 그들이 하는 얘기를 거의 알아듣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은 어리석게도 대학시절의 전공지식은 소멸시효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인데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다시 지식을 채워 넣지 못하면 소멸시효가 중단 또는 정지가 되어 그 길로 말짱 도루묵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자기가 전공한 분야의 지식과 밥벌이용 지식을 섞는 방법을 찾지 못했던 것 같다.


그저 그동안 배운 기술로 평생 써먹으리라는 짧은 생각으로 그랬을 것이다. 이리저리 구르며 회사의 녹을 먹고살다 보니 그걸 알게 되더라. 그런데도 대학을 졸업한 지 10년이 넘도록 민법 책 한 번도 안 들여다본 이들이 법학을 전공했네라 하고 영자신문 하나도 안 본 이들이 영어를 전공했네라고 뻥치는 사람들이 여전히 내 주변에 많이 기웃거린다. MZ나 꼰대나 할 것 없이 모두.

웃기는 짓이다! 내 같은 사람들한테 들키면 뼈도 못 추릴 텐데.

어쨌거나, 어떤 분야를 전공하여 학위를 따거나 자격증을 취득한 사실은 그저 해당 분야의 공부의 출발 단계임을 일찍이 깨달은 일은 지금 생각해 봐도 매우 잘한 일이다.


어떤 분야에 있어서 객관적인 자격을 갖추었다고 해서 공부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운발이든 실력이든 전공을 해서 학위를 땄거나 시험에 합격하였을지라도 해당 분야의 공부를 엉성하게 하였으면 그것만으로 절대 밥벌이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론과 현실은 완전히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처럼 특정 대학의 학과를 나왔거나 시험의 합격자 수가 제한되어 있어 진입장벽이 두껍고 높게 쳐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평생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기는 했다. 그러나 획기적인 과학 기술, 특히 Artificial Intelligence와 같은 산업사회의 급격한 발전 때문에 업무와 직무 영역의 구분이 거의 흐릿해져 있는 오늘날은 그런 자격 하나로 엉성하게 지내는 것은 헛된 명예와 고통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공부는 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제대로 해야 한다. 자신만이 가진 참다운 기질인 개성을 찾으려면 어떤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 특정한 객관적 대상이나 양식에 전념하는 것이 좋다. 나 같은 경우 회사 업무와 관련하여 다양한 전공자들과 식견을 나란히 하고자 철학과 법학과 영어를 보통사람들의 수준보다 넓고 깊게 파 들어가고 있다. 이 또한 잘한 일이라 여기는 날이 올 것이다.​


아무튼, 길게 내다보며 정제된 수련을 해야 지적분야, 곧 정신적 분야에서 진정한 즐거움과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으며 오늘도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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