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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풀생각 Jun 06. 2024

어느 50대 근로자의 일기


회사생활을 하면서 30대나 40대에 한참 산을 오를 때 거꾸로 내려오는 50대 선배들을 많이 눈여겨보았다. 조금이라도 더 천천히 내려가려고 뼛골이 빠지도록 가장의 노릇을 다하던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어떤 이는 높은 산에 올랐다가 남들이 밀어 급격하게 아래로 떨어졌고 또 다른 이는 스스로 뛰어내려 갔고 그 나머지는 아무리 위에서 밀어도 안 떠밀려고 안간힘을 다 쓰며 버티기도 했다. 우리네 아버지도 바로 그러했을 것이다.

그들의 현실적 모습에 나도 곧 저럴 때가 올 텐데 하던 일이 엊그제 같다. 나도 그때가 되면 지금이나 그때나, 아니 지금보다 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슴을 활짝 펴고 고개를 똑바로 들며 두 눈을 부릅뜬 채로 큰 걸음으로 다니리라 다짐했다.




그때 각성하며 시작했던 법학이나 철학이나 영어 공부가 이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 물론, 내 기준에서다. 법•철•영 공부는 자기 일을 잘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일이란 생계수단일 뿐만 아니라 자아실현의 도구다. 그러므로, 일이 없다면 삶은 별 뜻이 없다.

아주 오래전에 이 세 가지 공부가 구체적으로 내 일에 어떤 뜻을 부여할지를 전혀 알지 못한 체 무작정 시작했다. 무지를 깨치고 당당하게 살기 위해 하나라도 더 알아야 했다. 영어나 철학은 원래 해오던 공부라 목적이 뚜렷했다. 때문에 따로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쓸데없이 물어보지 않았다. YouTube를 찾아다니며 그 분야 최고 석학의 강의를 많이 듣고 책을 읽었다. 내 주변에 나만큼 더 잘 아는 이가 없다고 여겼다. 참고로 나는 이런 분야에선 아주 잘 난척하는데 특화된 사람이다.

그러나 법학은 이 과목들과 조금 달라 보였다. 전임자들에게 금융분쟁조정 업무를 잘하려면 민법과 민사소송법을 어느 정도 공부해야 하는가를 물었다. 그때, 그들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저 자본시장과 금융 투자에 관한 법률이나 투자권유준칙과 같은 규정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그 길로 그들을 따르지 않고 그들과 다른 길로 갔다. 회사에서 나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사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일인데 민법 공부가 필요 없다고 하니 모두 엉터리라 봤다. 알면 보일 텐데 모르니 그러했음에 틀림없다.

그들의 말을 옮겨 보면, 굳이 민법 지식이 필요하다면 법무팀의 변호사들에게 물어보면 된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서는 너무도 한심해 더는 그들에게 물어야 할 까닭이 없었다. 그 길로 나는 철학과 영어 공부를 할 때처럼 나 말고 이 길을 잘 아는 이 없다고 봤다. 그리고 온갖 법학 교과서와 판례집 그리고 분쟁 조정 사례집을 읽어댔다.

그렇게 했더니 어느 날 나의 길이 보였다. 이제는 법학도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깨닫게 되었다. 새로운 의견을 생각하여 낸다는 뜻의 창의(創意)라는 거도 업무 할 때 반영한다. 기존의 틀을 자주 깨려 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찾아서 한다. 그야말로 일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어떤 일을 하면서 남의 지식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면 비굴해진다. 반대로, 자신이 줏대를 세워 놓고 남의 의견을 참조하는 것이라면 당당해진다. 내가 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아 민법을 아주 열심히 배우고 물었다. 그때마다 마음속 깊이 둔 생각이 하나 있었다. 곧, 자신의 일을 함부로 하는 자는 스스로를 막 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는 남으로부터 꼭 그런 대우를 받게 된다. 법 공부를 단순히 무슨 자격시험에 통과하기 위한 또 교양 쌓기가 아닌 생존의 무기로 활용하기 위해 아주 열심히 했다. ​




법학과 철학과 영어 분야의 진짜 전문가가 내 처지를 보면 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세 분야를 제대로 해두면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더라도 당당해질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분야별로 아주 우수한 전문가가 있을지는 몰라도 이 세 분야를 골고루 잘 알고 엮어가는 사람은 드물다. 희소가치가 있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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