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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풀생각 Apr 22. 2024

꽉꽉 채워야 절로 비워지는 것


내 나이 정도가 되면 사람들 사이에 평준화가 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물질적인 부를 바라보는 눈이다.

젊을 때는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아등바등했는데. 생각한 만큼 많이 벌었는지 아니면 포기를 했는지 모두 같은 소릴 한다. 그거 다 싸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닌데. 그러면서 모두 비우자 한다. 그러고는 건강이 최고라며 즐기며 살자 한다.

평소 책 한 권 거들떠도 안 보던 사람들이 갑자기 산사 스님이 되더니 도인이 되었다가 마침내 신선이 되고야 만다. 그러면서 정신으로 배우는 것도 그만두고 무작정 즐기자 한다.

큰 착각을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노자나 장자나 법정 스님이 생전에 얼마나 넓고 깊은 공부를 하셨는데. 스님이 말년에 병실에서 정좌를 하고 책을 읽으시던 모습이 여전히 내 눈앞에 뚜렷하다.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나도 저리 살기로 했다. 마음이 멀쩡하다면 그 무엇도 두려울 게 없다. 돈 같은 세속적인 물질과 달리 얼은 채우면 채울수록 욕심이 많이 사라짐을 그분들이 일깨워 주셨다.



돈은 참 희한하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 진다. 남이 나보다 많으면 부럽고 적으면 업신여긴다. 투자도 그렇고 노름도 그렇고 내기도 그렇다. 하면 할수록 더 빠져든다. 탐욕이 생긴다. 권력도 매한가지다.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인정되는 이름이나 자랑 또는 그런 존엄이나 품위를 뜻하는 명예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렇게 사는 큰 어른을 요즘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함석헌 선생, 성철 스님, 리영희 선생, 법정 스님, 백기완 선생 같은 분들… 이분들의 모든 저작을 읽을 수 있었다는 자부심 하나로 한글로 쓴 책은 읽지 않는다는 죄책감은 조금은 덜어낸 듯하다.

아무튼 많이 배우나 적게 배우나 높은데 올라가나 낮은 곳에 있으나 모두 거기서 거기라 한다. 물론 돈으로 가치를 매겨서 그렇다. 나는 그럴 줄 알고 진작에 물질을 향한 그런 마음을 많이 버렸다. 그 대신 정신적인 분야를 꽉꽉 채우려 노력해 왔다. 그리고 그곳은 여전히 더 채우려 한다. 거기는 희한한 게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더 텅 빈 것 같다. 확실히 가득 채워야 비울 수 있는 곳이다. 분명 여러 번 읽고 뜻을 되새긴 듯한데 모르는 것투성이다. 차라리 모르고 살았으면 허울로라도 꽉 찬 느낌으로 살고 있을 텐데.



2022년 1월부터 2024년 4월까지 The Economist를 한 권도 빼지 않고 읽어야 할 부분은 모두 다 읽었다. 매권 당 전체 쪽수의 60% 이상을 읽었다. 스스로가 대견스러워 한 권도 빼지 않고 모두 모아 두었다.

책 서재 아래 칸에 모셔두었다가 오늘에서야 모두 버린다. 신간 원서가 차지해야 할 공간을 내주기 위해서다.


새로 산 원서들이 책상 위에 가득 쌓여 자리를 많이 차지해 마치 고시생을 방불케 하니 너저분하다고 그분이 싹 다 치우라 한다. 모두 hardcover라 관상용으로 뛰어났는데도 그런다.


몇 년 전 세계의 석학들만 본다던 The Economist를 상당한 수준까지 읽을 수 있다는 뿌듯함에 그 기록을 남기려 모아두었다. 그런데, 이제는 모두 재활용 폐지로 분류한다. 그냥 쓰레기일 뿐이다. 앞으로 이처럼 더 이상 모을 생각이 없다. Financial Times와 같은 급으로 분류해서 매주 다 읽든 아니든 그냥 다 버릴 생각이다. 이젠 그래도 될 듯하다. 드디어 그 정도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다.

채우면 채울수록 저절로 비워지는 것이 돈과 달라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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