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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조 투수의 무게

함성 없는 마운드 위에서

by 김정섭

11대 3. 스코어보드는 이미 승부를 선언했다.

우리 팀 패전조 구원투수가 마운드를 밟는다.

이미 승부가 기운 가운데 함성도 열기도, 야유조차 없다.

관중석은 절반쯤 비어 있고, 남은 사람들의 시선도 이미 다음 경기로 향한 듯하다.

그가 올라오는 순간, 경기장은 잠깐의 공백을 삼킨다.


차가운 밤바람이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다.

공기 속에는 훈련의 땀, 글러브의 가죽 냄새, 그리고 무관심의 냉기가 섞여 있다.

아무리 깔끔하게 이닝을 막아도 유의미한 기록 하나 가져가지 못한다.

가끔 타격 폭발로 역전을 거둬 승리 투수가 될 수야 있겠지만,

아무래도 큰 점수 차 앞에서 그런 기대는 다소 소모적이다.

패전조 투수는 승패가 이미 기운 순간, 긴 이닝을 홀로 떠안는다.

덕아웃의 표정은 계산적이다.

누군가는 내일의 로스터를 생각하고, 누군가는 다음 타석을 준비한다.

그들이 막아도 박수는 없고, 무너지면 책임도 묻지 않는다.

패전처리마저 하지 못하면 명함이 사라지는 세계.

그런 냉혹한 현실에서 이들은 프로로서의 자존심과 생존을 위해 매 투구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들의 모습이 20대 초반의 내 삶과 겹쳐 보였다.

우리는 스펙과 알바, 무급 인턴 사이를 오가며 이닝을 이어간다.

깔끔히 일을 해도 대외적 보상은 흐릿하다.

어느 순간, 누군가의 ‘필승조’로 올라갈 기회는 닳아버릴 수도 있다.


나는 묻는다.

이 무대에서 무엇을 위해 던지는가.

이닝을 지켜낸다 해도 내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저할 수는 없다.

대충 하면 끝장이다.

1군에서 제외되는 건 순식간이다.


지금 마운드 위에 올라와 있는 이는 나다.

보장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나는 오늘, 이 손으로 공을 쥔다.

송진 가루를 손끝에 묻히고, 숨을 고른 뒤 포수 미트를 겨냥해 공을 던진다.

냉담과 불안이 뒤엉킨 그 공들에는, 비장함과 함께 아주 작지만 단단한 결의가 담겨 있다.

무의미를 회피하지 않겠다는 결의.


이 공들이 결국 어떤 기록을 남길지, 내게 어떤 보상이 돌아올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오늘도, 공 하나를 던지는 것으로 충분히 살아남기로 한다.

냉담과 불안은 내가 뿌린 공과 함께 사라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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