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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한 곳, 자기확인

by 김정섭

누구나 자신의 깊은 곳엔 희미한 듯하면서도 다소 몽롱한 저마다의 영광들, 상흔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종종 현실도피를 재촉하는 매개체들입니다. 우리는 당연하던 일상이 어느 날부턴가 지치게 다가올 때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종종 과거로의 회귀를 시도합니다. 특별한 목적은 없습니다. 그저 앞으로 나아갈 자신이 없으니 일단 어디에라도 의지하고 싶은 심정은 아닐지 싶네요. 잠시 멈춰 선 채, 주저앉은 채,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자잘한 자취들이 한 데 묶인 단상, 혹은 공간에 머무를 때면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발목 잡힌다는 생각에 발목 잡혀 괜한 죄책감, 자책감에 시달리곤 합니다.


저 역시도 그래왔던 것 같네요. 저의 학창 시절은 대입 실패라는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중학교 전교 1등 졸업이라는 명예를 등에 업고 고등학교 진학을 했지만 반 1등은 고사하고 반에서 3~5등을 전전하며 감내해야 했던 수많은 뒷말과 조롱. 공부가 인생의 전부인 줄로 알고 살았던 저에겐 학교라는 공간은 그야말로 자기 파괴를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공간으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에 와서도 힘에 부칠 때면 종종 저의 쓰라렸던, 수치스러웠던 학창 시절을 왕왕 떠올리곤 합니다. 그것들은 잠시나마 현실에서 저를 로그오프 시키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저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시켜 줌으로써 내가 이런 것도 이뤄봤던 인간임을, 내가 이런 것도 견딜 수 있는 인간임을 다시금 상기시키지요.

아무래도 인간이란 자신의 추하고 창피스러운 곳에서부터 자존을 생생히 감각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거기서 비로소 더 건설적인 자화상을 그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영광스럽고 잘난 부분에서보다는.


(소설 "무진기행"을 읽으며 떠오른 제 생각들을 글로써 발전시켜 보았습니다. 소설에 대한 해설을 애써 담으려고 하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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