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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하 Apr 07. 2021

커튼콜

- 서이레・나몬, 웹툰 <정년이>에 대하여

1. 목청만 튼 정년이, ‘소리’ 찾아 삼만리 

   


  나는 절대 엄니처럼은 안 살 거요!


  1956년 8월 목포, 집에서 쫓겨난 윤정년은 울지 않는다. 외려 지금은 두 발로 나가지만 올 때는 자가용 끌고 올 테니 두고 보라며 호기롭게 소리치고선 서울로 향한다. 별다른 준비 없이 빈손으로 집을 나선 정년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왕좌왕 헤매지 않는다. 곧장 매란국극단으로 가 단장을 찾는다. 단장은 정년이 ‘하늘을 울린 소리꾼’ 채공선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노래 한번 해 보라고 한다. 목포 시장바닥에선 소리깨나 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정년은 자신만만하게 목청을 높인다. 


  지금은 비록 가난하고 볼품없지만 언젠가 세상을 뒤엎을 재인(才人)의 첫 등장일까. 원석을 알아본 단장이 입을 벌리고 감탄하며 당장 데려가려 하거나 정년의 목소리에 멍해진 주변 사람들이 뒤늦게 박수갈채를 보내는 등의 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단장은 정년에게 “목청만 텄다 뿐 소리에 가시가 서서 듣기 아주 괴롭고, 팔이며 다리며 뻣뻣하기 짝이 없고, 소리를 쥐어짜느라 표정도 엉망”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주눅 들어 다시 집으로 돌아갈 만한 상황에서 정년은 트럭 짐칸에 몰래 숨어드는 패기를 보여 준다.  



  서이레・나몬 작가의 <정년이>는 1950년대에 대대적인 인기를 누리고 1960년대 말에 서서히 사라진 ‘여성국극’을 소재로 다룬 작품이다. 여성국극은 연기로 승부를 거는 연극과 다르고, 한 사람이 모든 배역을 도맡는 판소리와도 차별화된 장르이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연기면 연기, 삼박자를 고루 갖춘 최고의 배우만이 국극 무대에 오를 자격을 갖춘다. 여성국극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배역의 성별과 관계없이 모든 역할은 여자가 맡는다는 것이다. 그중 왕자 역할을 맡은 최고의 배우는 인기와 명성은 말할 것도 없고, 정년의 입을 빌리자면 “돈을 가마니로 번다.” 


  말끝마다 돈타령하는 정년은 재능 있는 인물을 다룬 여타 이야기들 속 주인공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며 남몰래 노력하고, 언젠가 자신의 무대를 얻어 빛 볼 날을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적이고 나약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정년은 언제나 씩씩하고 솔직하다. 자신을 홀대하는 매란국극단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정년을 움직이는 힘은 꿈이나 자아 같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돈이라는 구체적인 물질이다. 



  부를 거머쥔 정년이 그것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아직 자세히 그려지지 않았다. 부자 된 모습을 어머니한테 보여 주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이 스케치처럼 짤막하게 묘사될 뿐이다. 특별한 사명감이나 꼭 소리를 해야만 한다는 절박함 없이 여성국극의 세계에 뛰어든 정년의 가슴 속에 움튼 씨앗이 어떤 모습으로 자라나는지 지켜보는 것은 이 작품의 주된 흥미 요소이다. 비장한 동기가 없었던 정년이 극단에서 맡은 역할을 소화하는 동안 소리에 대한 마음도 질곡을 겪으며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2. 어떤 역할이든 ‘여성’에게 내어 준 이야기    



  기존의 서사 장르에서 여성 캐릭터는 한정된 역할만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은 주로 남성 캐릭터의 성장 과정에서 어떤 깨달음을 주는 도구적 인물이거나 성녀-악녀의 이분법적 구도로만 해석되는 평면적인 인물로 등장했다. 시대가 흐르면서 욕망과 결핍이 있는 여성 캐릭터가 그려지곤 했지만, 여전히 독자들은 성(性) 고정 관념을 그대로 답습하는 작품들을 견뎌야 했다. 



  여성을 미화하거나 멸시하는 식의 단순한 해석에 지쳐 있던 독자들은 중심인물이 모두 여자인데다 어느 한 명도 허투루 다루는 법 없는 <정년이>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제목에 주인공의 이름만 남길 만큼 정년의 성장 서사를 기본으로 하지만, 그 여정에 함께하는 다른 인물들도 각각의 서사를 붙여 작품화할 수 있을 만큼 고유하다. 



  정년과 시기와 질투를 주고받고, 치열한 경쟁을 하고, 서로 이끌어 주며 뭉클한 순간을 나누는 사람들은 모두 홍주란, 백도앵, 허영서, 권부용, 고 사장, 문옥경 등의 여성 캐릭터들이다. 이렇게 여러 여성 인물이 한꺼번에 등장하는데도 이야기의 전체적인 균형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모든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려 내고자 한 명 한 명에게 초점을 맞춰 개인의 균열을 보여 주는 데 급급한 것도 아니다. 



  다른 인물의 전사를 풀어낼 땐 정년과의 연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이야기가 전부 드러나지 않도록 여백을 남겨 둔다. 정년이 주인공으로서의 무게를 잃지 않으며 뚜벅뚜벅 제 갈 길을 찾아갈 수 있게 안내하는 것이다. 덕분에 독자는 그 인물에 대해 어림짐작하며 빈 공간을 채워나갈 수 있고, 그러다 보면 결이 풍성하게 살아나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나한테 배우고 싶다고? 미안한데, 난 네 선생도 엄마도 아니야.


  처음부터 정년과 대립하는 인물로 나오는 허영서는 일주일 뒤에 올리는 <춘향전> 무대에서 정년이 방자 역할을 맡도록 지시한다. 이는 정년의 실력에 기대를 걸어 중요한 역할을 준 것이 아니라, 한 번도 무대에 서 본 적 없는 정년이 다시는 무대에 설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계략이다. 시장에서 푼돈이나 벌어먹던 실력으로 감히 남역 주연을 노리는 것이 괘씸하기 때문이다. 



  시련이 예측된 상황에서 정년은 자신만의 방자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주변 남자들의 몸짓, 목소리, 눈빛 들을 관찰하며 뽑아낸 특성을 흉내 내는 동안 정년은 현실의 자신을 잊고 다른 인물이 되어 보는 연기의 재미에 푹 빠져 지낸다. <춘향전> 공연 당일 정년은 무대에서 관객들의 눈을 붙드는 열연을 펼친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극은 정년을 지탱하던 나무 막대가 부러지며 위기를 맞는다. 극단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정년이 방자 역할을 맡은 것이 못내 못마땅했던 박초록이 나무 막대에 금을 내놓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인공을 미워하는 인물은 딱히 그럴 이유가 없어도 주인공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다. 이 작품 역시 영서가 정년이 다시는 무대에 서지 못하도록 온갖 술수를 다 부릴 것처럼 포석을 깔아놓았다. 하지만 정작 무대 위에선 영서가 정년을 배우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닥에 철퍼덕 엎드린 정년에게 영서는 “넌 할 만큼 했다”고, “뒤는 자신이 수습하겠다”고 속삭인다. 



  이 장면은 영서가 정년에게 호의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상대를 짓밟기 위해선 부정한 술수도 마다하지 않는 맹목적 악당도 아니란 사실을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영서가 정년을 견제하는 건 정년이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제 눈엔 형편없는 정년을 국극에 대해서만큼은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 백도앵이 추천한 데 울분을 느끼는 것이다. 이 모든 감정과 행동은 결국 국극에 대한 영서의 깊은 야심과 애정에서 비롯한다.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어도 편법을 쓰지 않는 정의로운 인물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다채로운 사연과 맥락 속에서 빛나는 여성 캐릭터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충실히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깊은 울림을 준다. 이미 그들의 삶 자체가 다른 의미로 겹겹이 싸인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어느 한 면만 부각한 작품으로 왜곡된 정체성을 접해온 독자들은 완전무결하진 않지만 그래서 사랑스러운 인물들이 서로의 관계망 속에서 성숙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지금-여기 2021년을 살아가는 여성의 마음이 1950년대 여성의 소리로 돌아오는, 시대를 초월한 공명과 같다.    



3. 현시대에도 유효하게 읽히는 성차별적 맥락     



  누가 봐도 능글맞은 사내가 있다. 여자들에게 치근덕대기만 하는 한량, 고 사장은 사실 남장여자이다. 고작 어깨를 딱 벌리고 목소리를 깔았을 뿐인데 모두가 그를 남자로 생각한다. 여자의 모습일 때 자신을 업신여기던 시선은 남성복을 입고 긴 머리를 숨김과 동시에 사라졌다. 같은 언행도 성별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직접 겪은 고 사장은 여자됨과 남자됨이 참 가소롭다고 말한다.



  정년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귀갓길에 남학생 무리에게 러브레터를 빼앗기고 우는 부용을 구해주려 했지만 자신의 힘만으론 역부족이었다. 정년이 남이 쓴 편지를 함부로 읽으면 안 된다고 소리쳐도 남학생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도리어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악랄하게 군다. 때마침 고 사장이 나타나 사과하라며 혼쭐을 내자 남학생들은 곧바로 미안하다고 말한 후 줄행랑을 친다. 정년은 자신이 한 말이나 고 사장이 한 말이나 똑같은 내용인데 완전히 다른 반응에 억울해서 운다. 




  “너, 고양이 울음소리를 진지하게 듣는 사람 봤냐? 인형에게 말을 걸고 답을 기다리는 사람 봤어?” 고 사장의 물음에 정년은 “나는 인형도 고양이도 아니잖어라!” 하고 큰소리로 외친다. “맞아. 그걸 모르는 남자들이 많지.” 고 사장이 들려준 이 이야기는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을 규정하는 기준의 모순을 상징적으로 끄집어내고 우리 사회의 성차별 문제를 되돌아보게 한다. 또한 현재까지 내려오는 여성 멸시의 유구한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고 사장(남성)이 한 말은 제대로 알아들은 남학생들에게 정년(여성)의 말은 귀담아들을 가치 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여성을 고양이나 인형 취급하는 세상에선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같은 내용의 말도 누가 전달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그 차이가 성별일 땐 차별로 이어질 때가 잦다. 이와 같은 부조리를 끊으려면 여성을 인간으로 대우하면 된다. 이 간단한 방법을 모르거나 모르고 싶어 하는 남자들이 많기 때문에 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고 사장의 입을 통해 담담하게 흘러나온다. 이 이야기가 과거의 어느 시공간을 다루는 작품 속에만 머무르지 않는 건 지금 여성들이 처한 현실에도 유효한 메시지를 주기 때문이다.         



세상은 거대한 여성국극 무대 같아.
이성적이고 용감하고 근육질인 남자와 상냥하고 사랑스럽고 가녀린 여자.
사람들은 여자와 남자를 연기하며 살지. 국극 배우처럼.
하지만 평범한 삶 어느 날, 어떤 사람들은 느끼고 말아.
 ‘피곤하다.’,
‘답답해.’,
‘이건 내가 아냐.’,
‘이 지긋지긋한 연극 때려치우고 싶어.’,

‘하지만 그래도 되는 걸까?’



  작은 삽화로 삽입된 이 장면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틀이 누군가에게는 폭력과 억압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 틀이라는 것도 한 꺼풀만 벗겨내면 비어 있는 허상이라는 걸 효과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성별을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으로만 구분하는 것 역시 그 양쪽에 속하지 않는 누군가에게는 배제와 상처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른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선 좀 더 섬세한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4. 여자가 미웠던 우리, 뜨겁게 합을 맞추다     



백도앵이란 선배는 노래라믄 질색헌다든디. 허벌나게 못허나부지?



  처음에 정년은 짝 선배 백도앵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 대해 주워들은 소문을 얘기하다 도앵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고생한다. 정년이 별 뜻 없이 흘린 이 말은 주인공이 겪는 사소한 에피소드로 보였지만, 나중에 백도앵에 대한 서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그와 연결되는 중요한 단서로 등장한다.



  백도앵은 양반 신분을 내세우며 남성이 우월하다고 믿는 아버지에게 가부장적 사고를 주입받으며 자랐다. “넌 내 아들이야. 그리 여기고 가르쳤다. 족보 있는 양반이, 어떻게 남들 앞에서 노래하는 그딴 삼류 기생 놀음을….”, “아무리 가르쳐도 계집은 계집이구나! 이 더러운 것. 너도 기생질로 받아먹는 돈이 재밌더냐? 소리 팔고 춤 팔고 그러다가 나자빠져서….” 그럴 때마다 도앵은 자신을 옥죄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거부하려고 노력했지만, 한편으론 제 안에도 아버지의 잔상이 남아 있는 걸 느낀다. 



  도앵은 여성국극에 본능적으로 끌려 입단했지만 춤과 소리는 모두 기생이 하는 짓이라 생각해 연습하지 않고, 다른 배우들과 자신은 다르다며 애써 위안 삼아왔다. 문옥경의 지적처럼 ‘소리 못하는 자신을 좋아한’ 것은 기생이었던 어머니와 이모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도앵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 여성국극을 날카롭게 분석할 수 있고 연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면서도 제 안의 아버지를 버리진 못한 것이다.

미소지니(여성혐오)는 우리 앞에 노골적인 얼굴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때론 공기처럼 때론 물처럼 우리가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일상 곳곳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난 말이야. 여자가 미웠다.” 도앵은 담담하게 자신의 여성혐오를 고백하며 이젠 누구도 속이지 않고 소리와 춤을 배우겠다고 다짐한다. “안 미워할 순 없어도 덜 미워할 순 있겠지.” 하고 이야기하는 도앵의 목소리는 앞으로 도앵이 제 안의 아버지를 어떤 식으로 지워 나갈지 기대하게 한다. 



  도앵처럼 성차별이 익숙한 사회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누구든 제 안의 미소지니를 대면해야 할 때를 맞이한다. <정년이>는 그때 도앵처럼 도망가지 않고 용감하게 맞서는 것만으로도 한 발 나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노래한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마음이 세상을 좀 더 나은 쪽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은 나쁘기만 한 것처럼 보이는 환경에 매몰되지 않고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만들어 준다. 



  이 작품은 뛰어난 개개인을 조명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모여 ‘합’을 맞추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정년이 방자 역을 훌륭하게 해낸 것도 사실 재능의 힘만으로 이뤄낸 일이 아니었다는 걸 도앵이 가르쳐 준다. 무대에서 그저 서 있는 촛대를 수십, 수백 번 연습한 다른 배우들이 정년의 방자를 ‘받아 준’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는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 ‘군졸 1’ 배역을 맡은 정년이 대본에도 없는 군사설움을 부르면서 무대에 ‘윤정년’을 올린 것이 배우 사이 합을 깨트린 행동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자신이 맡은 배역에 취해 즉흥 연기를 펼치고, 관객들의 이목을 사로잡는 일은 배우에게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갈 수 있다. 이 작품은 홀로 빛을 내는 인물의 성공담에 집중하기보단 서로 다른 인물들이 합을 맞추며 무대를 무사히 끝마치는 과정을 선보인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남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다.



  언제나 다정할 것 같던 부용은 무대를 마친 정년에게 네가 한 건 연기가 아니었다고 냉정하게 말한다. 그러고선 정년을 데리고 자신의 합창부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정년은 합을 맞추려면 전체 소리, 다른 이의 소리, 나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언제나 자신을 응원해 주는 팬인 부용에게서 난관을 헤쳐나갈 실마리를 제공받는 이 장면은 정년이 이번엔 어떤 해결책을 찾을지 궁금하게 한다.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은 정년은 이리 부딪치고 저리 치이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마음을 끄는 인물인 정년은 무엇보다 순수하다. 정년은 허영서가 소리하는 모습을 보며 뛰어난 실력을 바로 인정하기도 하고, 달거리 때문에 데굴데굴 구르는 백도앵이 신경 쓰여 더운 날씨에 불당번을 서가며 쑥찜질을 해 바치기도 한다. 자기 잘못은 바로 시인할 줄 알고 용서를 구하는 용기도 있다. 그의 진심은 순간순간 가슴을 파고들어 우리를 웃게 한다. 



  우리는 정년에게 믿음이 있다. 그는 우아한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왕자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제 발로 뛰어다니며 자신만의 소리를 찾아갈 것이다. 고민하고 싸우고 흥분하는 과정을 겪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기꺼이 위하며 그들과 뜨겁게 합을 맞출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관객석에서 지켜볼 수 있어 벅차다. 우리는 정년의 무대가 막을 내리는 그날까지 함께하며 커튼콜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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