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빙하 Apr 07. 2021

'소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촘촘한 거짓말

- 이연, 웹툰 <화장 지워주는 남자>에 대하여

1. ‘여성’을 둘러싼 갖가지 목소리들   

  

  꿈 많던 어린 시절, 아이가 상상한 세계는 무한의 영역에 있었다. 그 드넓은 곳에서 아이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고 어디든 갈 수 있었으며 누구도 가본 적 없는 미래를 그려볼 수 있었다. “얘야, 넌 나중에 무엇이 되고 싶니?” 어른들의 질문에 아이는 재잘거리며 그때그때 다른 답을 했다. “그래. 넌 무엇이든 할 수 있단다.” 아이는 그 빛나는 메시지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가 마음껏 뛰어놀았다. 행여 견고한 벽에 부딪혀도 주저앉지 않았다. 온 힘 다해 벽을 깨부수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갔다. 



  제 한계를 지우며 성인으로 자라는 동안 아이는 종종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여자는 예쁜 게 최고지. 요즘 시대엔 외모를 잘 가꾸는 것도 하나의 경쟁력이야.”, “너무 잘 꾸민 애들은 왠지 골 비어 보여.”, “똑똑한 여자는 부담스러워.”, “잘 웃어주는 여자가 좋아.”, “여자는 자고로 애교 많고 남자 기 살려 줄 줄 알아야 사랑받지.”, “남자한테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는 불쌍해. 웃는 얼굴에도 그늘이 져 있어. 아마 평생 외로운 인생을 살 거다.” 대개 아이의 성별이 여성이라는 것과 연관된 그 목소리들은 아이의 몸에 물처럼 스며들어 아이를 가라앉게 했다.



  이연 작가의 <화장 지워주는 남자>는 이처럼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고 꿈을 키워온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불평등한 구조의 억압과 착취를 탁월한 에피소드로 낱낱이 풀어낸다. 자칫 교훈적이고 진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주제를 유기적인 구성, 입체적이고 주체적인 캐릭터, 다음 회차를 궁금하게 만드는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풀어내 독자를 단숨에 사로잡는다. 스스로를 ‘꾸미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고 성적은 그냥 평범하고 친구도 없고 존재감 없다’고 여기는 주인공 김예슬의 성장 과정을 함께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인물에게 진심으로 공감하며 응원을 보내는 자신과 만나게 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매력은 신선하고 치밀하다는 데 있다. ‘미소지니(여성혐오)’와 ‘루키즘(외모지상주의)’을 다루는 작품이 제시할 법한 뻔한 전개를 보기 좋게 배반하며 눈부신 통찰력을 보여 준다.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거나 내면의 진정한 자신을 돌아보자는 낯익은 방식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현상의 이면을 좀 더 깊숙이 파고들어 이 시대의 성별 고정 관념을 해부해 독자의 눈앞에 드러낸다. 덕분에 이 작품의 독자는 여성이 겪는 차별적 언어와 폭력이 어떤 단계를 거쳐 한 개인을 옥죄고 통제하는 문화로 자리 잡는지 그 면면의 실체를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다각도로 놀라운 이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는 설정은 주인공이 최고의 기업 GC가 함께하는 초대형 서바이벌 메이크업 화보 쇼인 ‘페이스 오프 신데렐라’에 나간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친숙한 소재인 ‘메이크업’을 전면에 내세워 토너먼트 형식이 주는 특유의 긴장감을 적절하게 활용한 점이 핵심이다. 사회가 ‘여성’과 ‘아름다움’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인식하는 만큼 고도로 발전한 미용 산업은 교묘하게 작동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바로 이 부분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포착한다.



  모델 김예슬과 메이크업 아티스트 천유성이 경합 주제에 대해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발상의 전환을 꾀할 때마다 독자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한 가지 색조 제품이 돋보이는 사진을 연출할 것’이라는 예선 과제를 받은 후 유성은 강하고 섹시한 여전사 메이크업 아이디어를 낸다. 이때 예슬은 “전사가 왜 섹시하기까지 해야 하느냐”고 의문을 던진다. 



  이는 미디어에서 여성 히어로를 소비하는 방식을 떠올리게 하는 지적이다. 몸에 딱 달라붙어 보기에도 불편한 슈트를 입은 채 아찔한 하이힐을 무기 삼아 상대방을 공격하는 여성 히어로의 모습은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세계를 구하는 직업인마저도 영웅이라는 정체성보다는 여성이라는 성별을 부각하는 방향으로 연출하는 것이다. 



  예슬은 전사라면 매력적이기보단 위협적으로 보이고 싶다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른다. “안 자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예슬이는 머리 기른 게 더 예쁜데.”, “솔직히 여자는 긴 생머리가 제일 예쁘지 않냐?” 그간 숱하게 들어왔던 목소리들을 뒤로하는 예슬의 행동엔 거침이 없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고 실행에 옮긴다는 사실 자체가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기 때문이다.     


 

2. 내 얼굴을 닮고 싶다고 말하는 너에게   


   

  내 욕망과 남의 욕망이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요즘 시대에 자기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캐릭터의 등장은 특별하다. 예슬은 언제나 자신만만한 인물은 아니다. 짝사랑하는 선배에게 가스라이팅당하고 여성을 향한 사회의 이중 언어를 착실히 습득한다. 그 과정에서 때때로 의기소침해지고 스스로에 대한 의심에 빠지기도 한다. 예슬이 동경하는 여신 주희원 역시 예쁘고 당당해 보이지만 그 아름다움의 권력이 얼마나 허망한 개념인지 깨닫고 환멸을 느낀다. 



  희원은 타인의 평가에 맞춰 외형을 가다듬어야만 얻을 수 있는 아름다움의 가치가 종잇장보다 얄팍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꼭 아름답지 않아도 된다는, 저처럼 해도 된다는 용기를 주고 싶어요. 희원 씨는 어때요? 다른 사람들이 희원 씨를 보고 ‘당신처럼’ 했으면 좋겠어요?” 32강 본선에서 자신과 같은 주제로 경쟁하는 연누리의 말에 희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모두가 선망하는 ‘예쁘다’는 말에 갇혀 사는 것이 그리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회 당일 희원은 인어공주로 분한 누리의 모습을 보자마자 자신의 패배를 확신한다. 헤엄치는 데 방해가 될 뿐인 머리카락이 없고, 몸에는 비늘과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어 있고, 어둠 속에서 눈은 필요 없기에 이미 하얗게 멀어 버린 형상. 인간이 보기엔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모습이지만 인어공주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바다에 사는 그에겐 그 모습이 가장 자연스러우니까. 그의 아름다움은 바다에 있으니까. 



  예상과 달리 희원은 그 승부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다. 파격적이지만 묘하게 불편한 연누리&박이랑 팀의 화보보다 식상하지만 확실히 아름다운 희원의 화보가 다수의 지지를 받은 것이다. 희원은 조작된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결과를 납득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건들을 겪으며 미의 기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점차 자신의 자연스러운 얼굴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변하는 희원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탈코르셋 운동의 문제의식을 생각하게 한다. 



  이 첨예한 문제의식을 확장하기 위해 이 작품이 택한 것은 여성에게 꾸밈노동을 강요하고 소비를 부추기는 코르셋이 나쁘다고 외치는 단순한 방식이 아니다. 그보다는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는 여성의 다양한 입장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사려 깊게 접근한다. 모델, 아티스트, 사진가 등 메이크업 화보 쇼를 선보이는 각기 다른 주체의 전문적인 작업도 충실히 다루는 동시에 자기만족의 범위,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는 식이다. 희원이 자신을 닮고 싶다고 순진무구한 얼굴로 말하는 어린 여자아이를 꼭 안으며 미안하다고 속삭이는 장면은 탈코르셋 운동이 다음 세대의 소녀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3. 도움을 구하는 여자의 손을 붙드는 마음으로      



  지금 젊은 세대의 여성들은 성별 제약 없이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자아실현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성(性)의 차이가 차별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너무 마땅해서 지루한 소리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서로 같은 인권을 공평하게 부여받았다고 믿어온 여성들은 저마다 다른 지점에서 기울어진 축을 발견한다. 누군가는 휘청거리더라도 그 위에서 끝까지 살아남으려 하고, 누군가는 무게를 옮겨 수평을 만드는 일에 힘을 보탠다. 



  이 작품은 ‘소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당연한 말이 얼마나 촘촘한 거짓말이었는지를 등장인물들의 서로 다른 사연과 입장을 통해 확실히 드러낸다. 지금도 포털에 ‘Girls can do anything’을 검색하면 이 문구와 관련한 여러 논쟁이 나온다. 이 글귀가 적힌 물건을 사용하는 여자는 믿거페(믿고 거르는 페미)라고 하는 무리가 있고, 성적인 이미지로 남성에게 어필하는 걸그룹 활동으로 큰돈을 벌어놓고 이제 와서 의식 있는 척 자신의 사상을 드러내는 게 같잖다는 의견도 있다. 그들에게 ‘우리(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문장도 논쟁의 여지가 있을까. 모두의 의지를 북돋워 주기엔 무난하기까지 한 이 문장의 주어 자리가 ‘소녀’인 것만으로 문제적 선언이 된다는 건 그만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과 남성이 다른 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반증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만의 싸움을 하는 여성들은 다음 세대에게 고작 ‘소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당연한 말을 들려주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더 진취적이고 전복적인 문장이 필요하다. 이 작품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초반에 예슬은 어떤 남자가 희원에게 줄 주스에 약물 타는 모습을 우연히 목도한다. 위험한 상황이라 직감하지만 괜히 휘말렸다간 본인에게도 해가 미칠 것이라 생각해 주춤한다. 하지만 끝내 외면하지 못하고 결국 희원을 구해 준다.  





  정의감이 투철하거나 남다른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눈앞의 다른 여성이 처한 위험을 끝내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 내가 입은 피해를 다른 누군가는 피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 내가 노력하는 만큼 나아진 세상에서 살아갈 익명의 소녀를 생각하는 마음. 이 모든 애틋한 마음들이 이 작품의 여성 연대에 녹아 있다. 자기 자신으로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예슬과 희원의 얼굴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얼굴을 반영한다. 그들과 함께라면 ‘소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당연한 이야기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 너머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     

매거진의 이전글 커튼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