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는 꿈꾸지 않아
"광고는 제 꿈이었습니다."
면접 자리에서 늘 당당하게 외치던 말이다.
당시 그 말에 담긴 자신감은 진짜였다.
광고는 내 인생의 목표였고, 나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게 다시 물었다.
"내 꿈이 정말 광고였어?"
사원 3년, 대리 4년, 그리고 차장까지. 그렇게 7년이 흘렀을 때,
나는 더 이상 광고를 꿈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 입에서 그 단어는 무거워졌고, 광고는 그저 생계 수단이었다.
꿈이란 단어는 더 이상 내 속에서 울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광고라는 꿈을 이룰 만큼의 내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고,
그 꿈을 대하는 나의 자세 역시 순수하지 못했다.
내가 광고를 정말 꿈꿨다면, 더 치열하게 노력했을 것이고, 더 열렬히 사랑했을 것이다.
돈이 아니라 열망으로 나의 선택을 이끌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나는 할 수 있는 만큼만 했고, 타협했고, 게으름을 피웠다.
그러면서도 더 많은 성과와 결과를 기대했다.
그때 나는 광고가 꿈이라 말한 게 고작 나의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됐다.
꿈이 있다는 사실 자체로 자신을 위로하려던 욕망. 광고가 내 꿈이었다는 자기 합리화.
그리고 지금, 나는 면접관이 되어있다.
수많은 면접에서 마주한 지원자들은 입을 떼며 나처럼 말한다.
“광고는 제 꿈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그 진심을 확인하려 한다.
그가 정말 꿈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간절한지를 묻고 싶지만,
결국 나는 꿈이 아닌 ‘능력’을 확인한다.
잘하는가? 그저 그게 내가 알고 싶은 전부다.
회사는 꿈을 말하는 사람을 찾지 않는다.
잘하는 사람을 찾는다. 결국 꿈과 열정만으로 이 길을 걷기엔 너무나 냉정한 현실이 있다.
나는 같은 꿈을 꾸는 동지애를 느끼며 그들을 채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꿈’을 증명할 기회를 준다.
그런데, 종종 그들이 말하는 꿈의 무게는 기대에 못 미친다.
“꿈을 위해 고작 이 정도밖에 하지 않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도, 나 역시 염치가 없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광고를 시작한 것만으로도 이미 꿈을 이룬 셈일 수도 있다.
광고인으로서 이름을 알린 동료들을 보면, 내 마음속에 질투가 일렁인다.
그들은 내가 가졌던 꿈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노력보다는 학벌, 인맥, 운을 탓하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남들의 성과를 내 꿈의 잣대로 삼으며 그들을 평가했지만,
사실 그 모든 건 내가 진심으로 꿈을 좇지 못한 나의 변명이었다.
내 꿈을 남의 결과와 비교하며 스스로 이기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다.
결국 내 이기심이 나의 시야를 가렸고, 내 꿈을 빼앗았다.
광고는 내 꿈이었다. 나는 그 꿈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었다는 성취감은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바래져 버렸다.
광고는 더 이상 나에게 이상적인 목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잃어버린 것이 더 많았다.
꿈을 이루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꿈을 이루고 나서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꿈을 이루었지만, 그것이 내게 남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꿈이란 결국 나의 이기심에 따라 바뀌는 가변적인 무엇이었을 뿐이다.
난 꿈을 이루었지만, 그것이 내게 더 이상 꿈으로 남아있지 않다.
꿈은 이루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금 돌아보아야 한다.
나이 40이 넘어 난 다시 꿈꾸는 소년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