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보다 무서운 건 침묵이다
회사는 생각보다 작은 공간이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같은 회의, 같은 커피머신, 야근을 공유하며
서로를 잘 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실은,
서로를 ‘조금만’ 알고, ‘조금만’ 모른 채
지내는 것이 가장 안전한 거리였다.
처음 내가 속한 조직은 작았다.
야근 후 나눠 마신 맥주 한 잔,
누군가의 실수에 괜히 같이 미안해하던 날들.
그건 우정이라기보단, 생존의 연대였다.
우리는 서로를 시기하기보다, 의지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그러다 회사가 커졌다.
공간은 넓어졌지만, 마음은 점점 좁아졌다.
눈빛은 평가가 되었고, 성과는 경쟁이 되었고,
함께였던 일은 ‘내 것’과 ‘네 것’으로 나뉘었다.
그즈음, 한 사람이 새로 들어왔다.
성격도 좋았고, 일도 잘했다.
기존의 공기를 흔들 만큼, 자연스럽게 돋보였다.
그리고 그건 누군가에게는 위협이었다.
술자리였다.
그는 없었고, 직원 몇 명이 앉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자기 아는 사람을 통해 뭔가 들었다며
그에 대한 조심스러운 ‘의혹’을 꺼냈다.
그건 확인되지 않은 정보였고,
실은 확인할 생각조차 없는 이야기였다.
단지, 그를 깎아내릴 수 있다면 충분한 이야기였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괜찮던데.”
말은 가벼웠지만, 선은 분명히 그어졌다.
그녀는 당황했고,
그날 이후 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유 없는 험담, 흐릿한 말 전달, 애매한 공기.
몇 달을 피곤하게 버텼다.
하지만 싸우진 않았다.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을 감았고,
선만 지켰고 웃으며 대응했다.
사람은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시선 하나에도 금이 가고,
어떤 사람은 말의 칼날도 웃으며 넘긴다.
누군가는 사소한 한 마디에 며칠을 뒤척이고,
누군가는 정면으로 욕을 먹고도 잊는다.
그 차이를 ‘내구성’이라 부르지만,
나는 그 말이 불편하다.
왜냐하면,
그 말은 언제나 상처받은 사람만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무너질 거면, 애초에 버티지 말았어야지.”
“나는 별일 아닌데, 쟤는 예민하더라.”
이런 말들은 모두
피해자의 감정을 해석하려는 척하며, 가해자의 존재를 지운다.
문제는 내구성이 아니다.
문제는 공격이 존재했다는 사실 그 자체다.
누군가는 무너졌고,
누군가는 멀쩡했던 게 아니다.
단지 어떤 사람은 드러나게 부서졌고,
어떤 사람은 조용히 금이 가고 있었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고,
말하지 않는다고 괜찮은 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사람을 평가하기보다, 행동을 지켜본다.
그 사람이 강한가 약한가 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디까지 무너뜨릴 준비가 된 사람인지.
상처의 깊이보다, 상처를 만들고도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더 경계하게 됐다.
나는 그녀에게 붉은 등을 들이밀지 않았다.
다만 노란등을 켰다.
멈출 수 있는 신호, 경고,
멈추기를 바라는 마음,
선택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
아슬하게 노란등을 건너갔다.
결국 또 다른 사람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나는 지켜봤다.
그러나 예전처럼 분노하거나, 휘말리진 않았다.
이제는 안다.
노란등이 많아지면 속도는 줄고 언젠가는 미리 멈춘다.
붉은등이 들어오기 전에.
나는 직접 싸우진 않는다.
다만, 비켜갈 수 없는 농담 한 줄로 조용히 선을 긋는다.
웃는 얼굴로 켜두는 노란 불빛, 그게 내 방식의 경고다.
모든 내구성이 존중받는 공간을 위해,
모든 공격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순간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