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내 얼굴을 본지 너무 오래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끊임없이 ‘맞추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회가 요구하는 규칙에 따라 살아가고,
점점 개인적인 모습은 사라져 마치 하나의 부품처럼 기능한다.
그래도 사회성은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일 것이다.
문제는 이 사회성이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고,
그에 맞춰 자신도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래된 사회성에 적응한 사람들은 변화 속에서 ‘꼰대’가 되고,
새로운 사회성에 맞춰가는 사람들은 ‘비꼰대’로 불린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꼭 사회에 저항할 용기를 내야 할까? “
"사회성이 가장 유리하다면, 그에 적응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 아냐?"
요즘의 사회성이란 자율성, 독립성, 개인성을 추구한다.
그렇다. 그에 맞춰 살아가는 게 더 유리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 역시 과거의 규칙성을 선호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과거 나는 자율적인 출퇴근 시간을 원했지만,
막상 출근했을 때 내게 필요한 후임이 자리에 없으면 심기가 불편해진다.
내 안에서 ‘꼰대력’이 슬며시 고개를 쳐드는 순간 중에 하나이다
자율을 추구하던 내가 남들의 자율에는 불편함을 느끼는 모순에
차마 입밖으론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는, 내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내로남불,
이기심이다.
반대로 내 윗 조직과의 회의에서 임원들은 너무 맞는 말만 한다
맞는 말은 실천보다 쉽게 나온다. 맞는 말이야말로 가장 쉬운 일이지만,
그 말에 책임을 지고 실천하는 건 어렵다.
모두가 이기심을 버리고 이상적인 방식으로 움직여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회성은 계속해서 맞는 말에 따르라고 요구하지만,
결국 그 사회성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과 떠나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에 내 안에서는 “비 꼰대력”이 고개를 쳐든다
사회성이라는 가면은 모양과 색을 바꾸면서 우리의 얼굴을 사회에 조금도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시로 그 가면을 벗고 스스로의 모습을 직시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자유를 남들도 누릴 수 있게 허용하는 것,
그 자유 속에서 나의 규칙성을 유지하는 것. 누구에게도 이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준비가 되었을 때, 그 가면을 벗어두고 나 자신과 눈 맞추는 용기가 필요하다.
가면을 벗었을 때 가장 싫은 내 진짜 얼굴을 직시하는 용기가 나의 사회성을 찾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