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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작가 Mar 30. 2024

이별, 그것은

   가장 고결해야 하며, 가장 힘든 행위.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맞이하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던 그 순간을 운명처럼 맞이해야만 했을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아니게 된다. 소중했던 사람일수록, 각별하고 애틋하고 특별했던 관계였을수록 그 슬픔의 무게는 당신을 평생토록 짓누를지도 모른다.


   누군들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모르랴. 누군들 하염없이 운다고 하여, 자아 통제를 잃을 정도로 절규한다 하여 그 사람이 돌아올 거라 생각하겠는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놓아주어야 하는 것을 놓는 것. 진정 떠난 이를 위한다면, 그를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같이 행복했노라고 웃으며 손을 흔들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토록 힘든 일이 더 없을 것이다.


   증오하던 이와의 작별이라 할지라도 괜스레 더 생각나고 눈물이 나는 건 왜 그렇겠는가. 그만큼 응어리진 것들이 생전 살아있었을 때 다 풀지 못하여서인가, 아니면 내가 솔직하지 못해서인가. 이럴 때면 하늘도 무심하여, 풀지 못한 원한과 증오 덕에 스스로 더 절망해야 하는 꼴이라니, 이럴 줄 알았노라면 더 진솔했으리라, 살아있었을 때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못다 한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으리라. 이미 지나간 시간과 떠난 이의 빈자리는 나의 오만했던 자존심을 비웃으며 나를 응시할 뿐이다.


   비단 죽음만이 이별을 가져오지 않는다. 연인과의 헤어짐이나 고향을 떠나 출세하는 것, 어쩌면 잠깐의 작별까지. 이별의 크기를 어찌 헤아리겠는가, 그저 익숙해지기 어려운 형태만이 존재할 뿐이다.




   죽음과 관련하여 하나 다짐을 한 적이 있다. 부모님의 죽음에 함께해서 행복했노라고 말하며 그들의 마지막 자리를 채워주는 것. 눈을 감는 그 순간, 그 후 몇 분까지도 인간의 의식은 날아가 흩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그 순간만큼은, 떠나갈 때까지는 그들에게 행복한 작별을 선물해주고 싶다. 이 굳은 세상 살아가느라, 이 못난 이를 키우느라, 한평생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느라 너무나도 고생이 많았다. 나의 부모여서, 당신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행복했고 고마웠다. 이후로는 더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며, 적어도 희망찬 말들로, 평생을 가도 떠오르지 않았을 말들로, 늘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말들로 가는 길 편히 가라고 애도하는 게 불효자로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효도가 아니겠는가.


   가장 깊이 슬퍼하는 자는, 한 때 가장 행복하게 웃어주던 자였으니.


   죽음이란, 당신이 그자와 얼마나 후회 없이 함께 시간을 투자했는지에 대한 시험이다. 스스로의 죽음이 두려운 자는 아직도 삶에 미련이 가득한 자요, 부모의 죽음이 두려운 자는 불효자로서 참회를 끝마치지 못하는 자이니. 그러니 애틋했던 연인, 친구나 자기 친자식의 죽음은 얼마나 더할 나위 없이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하겠는가.


   한때는 나 자신의 장례식을 상상하며, 이딴 추모에 다른 사람의 시간을 쏟게 하느니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어찌나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이었던가, 만일 다른 사람의 정상적인 애도를 위한다면 해선 안 될 생각이었다.




   이별은, 평생을 헤아려도 예고 없이 찾아오는 존재이니. 어쩌면 그저 그들의 빈자리라 할지라도 겸허히 감싸안을 자신감이 필요했던 거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혹여 잊는다 해도, 그들은 그저 묵묵히 우리의 여생을 바라볼 뿐이다.




   2024 0330 0012

   자판의 무게를 느끼며, 난제를 다시 고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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