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행복
속삭이듯 부르는 노래가 흐른다.
내게 다정하게 건네는 말 같은데, 미안하게도 영어라 못 알아듣는다.
아침에 가볍게 집안 정리를 했다.
마른 옷을 개고,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도 끝냈다.
오늘은 바람이 흥겹게 분다. 찬기가 조금 남아 있지만, 충분히 봄 느낌이 났다.
예쁘고 명랑한 바람이다.
처음으로 새치 염색을 했다. 염색약에는 밝은 갈색이라고 인쇄돼 있었다.
내 머리칼을 검정색이다. 검정 바탕에 가닥가닥 보이는 새치에게 늘 섭섭했었다.
‘왜 자꾸 나이를 인식하게 하니?’
늙음을 잊고 살고 싶은데, 새치는 계속 상기 시켰다.
‘너도 이제 늙었어.’
나이 오십. 인생의 절반을 조금 넘게 살았다.
누구나 그렇듯, 나도 처절하게 살아왔다.
‘삶은 녹록치 않아. 원래 힘든 거야.’
인정한다. 인생은 원래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당연했던 삶의 태도에 의문이 들었다.
‘그래, 지구에서의 삶은 원래 힘들어. 인정해. 그래서?’
‘돈 벌기도 힘들고, 인간 관계도 힘들고, 몸도 힘들고, 심지어 뭘 먹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힘들지. 그래서? 그게 뭐?’
‘힘듦’과 50년을 동거동락했다.
마음을 짓눌린 채 산 건 50년으로 충분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뒤를 보고 서 있던 몸뚱이를 누군가 정면으로 획! 돌려 세운 것 같았다.
갑자기, 뜬금없이! 삶을 받아들이는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 버렸다.
‘나, 이젠 힘들지 않을래. 그 힘듦을 즐길래.’
원수 같아서 멀리 쫓아버리고 싶었던 그 녀석이,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나를 성장시킨 스승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힘듦은
생각이 짧고, 오만하고, 자존심은 더럽게 강했던 나를
이리저리 쥐어 패가며 둥글둥글하게 만들었다.
글쎄……, 한동안은 내 그런 변화가 사회에 물든 것이라고 폄하했던 것 같다.
사실은 정 반대였다.
내 생각은 더 깊어졌고, 다른 이들의 입장도 생각할 줄 알게 됐다.
내 마음에 줄기차게 생채기를 냈던 자존심은 자존감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제야 내 마음은 자유롭게 풀려났다.
한 달 동안
나를 서글프게 했던 것들, 힘들게 했던 것들, 신경 쓰이게 하는 것들을 구석구석 찾아서 내다 버렸다.
입으면 초라하게 느껴지는 옷들,
허술한 그릇들,
고장 난 가전제품들……. 전부 버렸다.
불 나간 전등은 교체하고, 어지러운 책상도 정리했다.
오늘은 과거의 에너지를 새 에너지로 갈아치우고 맞는 첫 주말이다.
새치 염색을 했다.
밝은 갈색 머리칼을 기대했는데,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짙은 검정을 살짝 벗겨낸 정도?
그래도 괜찮다. 아주 좋다. 뚜렷한 존재감으로 나를 서글프게 했던 새치는 싹 가려졌기 때문이다.
아마 새치도 내게 고마워 할 것이다. 지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관리를 받아봤으니 말이다.
염색도 했고, 평일에는 입을 일 없는 예쁜 원피스를 입었다.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은은한 불빛을 벗 삼아
글을 쓰고 있는 오늘,
미래의 기대로 가득 차 있던 소녀로 돌아간 느낌이랄까?
참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