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련은 극복하는 게 아냐

길치의 (일본) 오쓰행

by 쓰는사람 명진


여행의 목적지를 묻는다면,

나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거야

어느 도시인지보다, 누가 기다리는지가

나의 지도를 그리거든


오늘의 종착지는 오쓰

그곳엔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아침은, 간사이 공항 근처에서 맞이하고

점심엔, 교토에서 사진전을 보고

이제, 내 마음이 머무는 곳으로 이동 중이야


교토에서 전철로 40분 정도 떨어진 생활권인데

한국으로 치면 서울-경기도 같다고 할까.

교토는 교토 현에 속한 고즈넉한 곳이라면

오쓰는 시가현에 속하는데 내게 온기로운 곳이야.


"이 전철이 히에이잔 사카모토 역으로 가나요?"

두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단정한 인상의 여자분께 길을 물었어. 갑작스러운 영어어택에 깜짝 놀란 두 눈으로 잠시 쳐다보더라.


"히.에.이.쟌.사.카.모.토" 를 또박또박 발음하고 손짓으로 방향을 가리켰어. 휴대폰으로 무언갈 톡톡 찾던 그분이 내 손을 이끌고 3번 플랫폼 앞에 세워두더라

아는 말이 "아리가또 (감사합니다)" 뿐이라

웃으며 고개 숙여 인사하니까.

생글거리며 "생유 생유"라고 화답하는 그분과

고개 까딱이는 자동인형처럼 한참을 인사 배틀 했어.


그 짧은 순간이 어쩌면 오늘의 감정을 결정했을지도 몰라. 뜻 모를 타국 언어가 쏟아져도 답답하지 않고

리듬감 있는 새소리 같았던 건,

언어의 무지 너머에 서 있는 이방의 나를 선의로 대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겠지.


모르면 당하고

약하면 밟히고

어리면 무시당하는 게

평범이 되어버린 팍팍한 어른의 삶 속에서


길 모르는 어리버리한 여행객을

기꺼이 도와주는 타국의 타인을

이토록 자주 만날 수 있다니!

낯선 땅에서도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그게 오늘의 여행의 방향을 잡아주는 것 같아.


한국에선 지하철을 번번이 잘못 타는 내가

해외 가면 길도 잘 찾다니 참 신기해

아마도,

여행은 멀티태스킹이 아니라

일방통행이니까 그런 것 같아

다음 목적지 하나에만 집중하니까


그래서일까

복잡한 생각도, 정리 안되던 마음도 없어지는 거 같아.

고민조차 후순위로 밀려버리니까




6시 교토발 전철엔 귀가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어.

교복 입은 학생, 정장 입은 직장인, 희끗한 머리의 어른들까지. 이들이 향하는 곳은 '일상'이라는 집이겠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기다리는 이가 있다는 거니까. 그 생각만으로도 미소품은 질투가 생기더라.


누군가 곁에 있던 자리를 비운 뒤

남겨진 자는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질 때가 있잖아


아빠 곁에 있고 싶어서 고향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자리가 이제 텅 비어 버렸으니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그래도 다시 걸을 수 있는 힘이 생기는건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있기 때문인 걸까

슬픔은 사랑의 댓가이니까 말이야.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잔잔한 창밖을 바라보며 오쓰로 갈 거야.

이 길의 끝엔, 나를 기억해 주는 작은 식당이 있어.

작년의 나를 기억하고, 올해의 나를 반겨줄 사람들

코토노, 스즈호, 부처 셰프 그리고 마마짱


막막함을 안고 도착한 이 도시가,

다정함으로 나를 채워줄 줄은 정말 몰랐어.

작년 테이블 위로 흐르던 온기 덕분에

추운 시련을 무사히 건너올 수 있었던 거니까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전하러 가야지

이번 여행의 진짜 목적지는 지금부터니까.



"시련은 극복하는 게 아니야.
함께 걷다가 어느 순간 혼자 있다면
그게 극복이야"




PS. 3번 플랫폼으로 이끌었던 그 여자분,

전철탑승 직전에 후다닥 뛰어와서 나를 붙잡아 다른 플랫폼으로 데려다 줌 (휴, 덕분에 길 안 잃음 성공)



이 연재는 여행정보 보다 ‘마음의 결‘을 따라갑니다.

한 조각씩 읽어도 좋지만, 처음부터 함께 걸어주시면

슬픔이 희미해지고 다정함이 스며드는 흐름을

더 선명히 느끼실 수 있어요.


제1화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