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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들어! 적은 발밑에 있지 않아"

몬트리올 YMCA gym

by 쓰는사람 명진


7. SELF DEFENCE


자기 방어가 필요해서 복싱을 시작했냐고? 전~~ 혀!

영어와 불어 사이에서 허우적대던 내게

복싱은 느닷없는 제3의 언어로 등장했다.


YMCA 헬스장 3층,

묵직한 샌드백과 전신거울이 반짝이는 이곳은 내게 방앗간 같은 곳. 그렇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멈칫했다.

문은 열려 있건만, 마음의 문이 안 열렸다. 흘끔흘끔, 머뭇머뭇


‘들어갈까… 말까… 내일부터 배운다고 할까…?’


껌딱지처럼 바닥에 착 붙은 두 발을 떼지 못하고 서 있던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친다.

“이봐!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아? 들어가자!”

뒤돌아보니 멘토가 한발 뒤에서 싱긋 웃고 있었다.

이제껏 쿨한 척해왔는데, 뒤통수에 숨겨둔 쪼다력을 들켜 머리를 긁적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멘토는 기본자세와 스텝 2개를 가르쳐 주고는 특별한 지시를 내렸다. 그건 바로, 전신거울 속의 나를 째려보며 연습할 것.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어 볼 옆에 붙여 가드를 올리고,

무릎과 골반으로 바디컨트롤 하면서 시선은 정면을 바라보기.

머리로는 완벽했는데, 몸은 딴 세상 언어를 쓰는 마냥

스텝은 흐느적, 펀치는 쭈뼛.

한참을 연습하다가 엉성한 발을 확인하려 고개를 숙이자, 멘토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HEAD UP (고개 들어!), 적은 네 발밑에 있지 않아! 언제나 네 앞에 있어!!!!”


분명 다정하던 멘토였는데, 그 순간만큼은 회초리 든 교관이었다.

‘그래, 적이 내 발 밑에 있을 리가 없잖아, 고개를 떨구면 결국 정수리로 패배를 인정하는 셈이지. 그렇다면 내가 주눅 들어 고개를 숙인 탓일까? 돈이 없어서 미운오리새끼가 된 나의 요즘 상황이?'

의식의 흐름은 어느덧 일터에서 겪은 오늘치의 푸대접으로 옮겨졌다. 한참을 머릿속의 나와 싸우고 있을 즈음, 사라졌던 멘토님이 돌아왔다 글러브 두 개를 가지고.


“껴 “
“네? 글러브요? 오늘이 제 평생 첫 복싱인데,,.”
“글로브 끼고, 가드 올려”
“네????”


말을 끝맺기도 전에 가드를 올린 오른팔에 주먹이 날아왔다. 힘이 실린 펀치는 아니었지만, 조금은 아팠다.

걸음마 스텝으로 도망 다녔지만 피한 것보다 못한 게 더 많았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힘을 뺀 펀치도 차곡차곡 쌓이니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만하고 싶다 말을 하려고 손을 내리는 순간.


SELF-DEFENCE SELF-DEFENCE,

PROTECT YOURSELF”

(자기 방어, 자기방어해! 니 자신은 네가 지키는 거야)


그 순간 눈빛이 돌았다.

그렇다 돌았다는 표현보다 더 정확한 말은 없었다.


글러브 낀 손을 올려 다시 가드를 하고 배운 적도 없는 펀치를 휘둘렀다. 대부분은 빗나갔지만 운 좋게 서너 번은 명중했다. 아주 정확하게. 글러브 너머로 느껴지는 짜릿한 타격감은 어느새 눈에서 광끼를 띄게 했다.


“GOOD GIRL! 잘했어, ONE MORE, 또다시”


얼마나 흘렀을까.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숨이 턱까지 차오를 즈음 멘토는 글러브를 벗으며 원래의 서글서글한 반달눈으로 돌아왔다


“막지 않으면 맞는 거야.

피한다고 피해지지도 않아.

때론, 때려야 살아.”


멘토의 그 말이 가슴에 꽂혔다.

글러브를 벗으며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어떤 것을 닦아내며, 환희를 느꼈다.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던 괴로움들이 그제야 몸속을 빠져나갔다.


그날 이후 한참 뒤에야 알았다.

거울을 보며 내적 갈등을 하고 있는 내가 슬퍼 보였다는 사실을,

그래서 멘토는 글러브를 가져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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