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의 여름. 우연처럼 만났다
압록강 건너 북한을 바라본 스물세살의 남한 사람.
몇이나 될까..
흔한 경험은 아니겠지..
이 흔치 않은 경험을 간직한지.. 1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나는 그동안 이 경험에 대해 조금도 노력하지 않았다. 아무 의미도 담지 않았고, 굳이 해석하려 들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차라리 싫은 기억이었다면 그 때문이라도 선명해졌을텐데,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흘러보내고 있었다. 세월따라 흩날려가겠지.. 뭐 그래도 상관없고.. 딱 그정도일뿐인 10일간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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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올해 초, 탈북자 친구를 우연처럼 만나 공감대를 좀 찾아볼까 싶어 10일간 연변에서 지낸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는데, 11년만에. 아직 연변에 남아있는 나를 만난 것이다.
[연변]
개그코너 사투리로 희화화되서 익숙한 그 이름.
우리나라는 [연변]이라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Yanjin; 옌지] 이라고 부른다. 북한과 가장 가까운 중국 땅. 우리와 닮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우리말을 쓰고 다니는데 아무 무리가 없는 신기한 곳.
스물세살의 나는 심각한 유럽병에 걸려있었다.
미국마저 영.. 매력없는 동네라며 무시무시개무시했으니, 중국은 뭐.. 내 살아생전에 엮일 일 없을거라며 기세등등하던 인생최고 기고만장의 시대. 그러던 어느 날 보스톤에 계신 큰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너 중국 가볼래?
(아...나... 중국이라니. 그런데를 돈주고 왜 가.. ) 그리고 딱 한마디 더하셨다.
"큰엄마가 돈 내줄게. 넌 그냥 따라만 가"
(오?) "좋아요! 콜!"
당시 중국을 싫어하는 마음보다 비교할 수 없이 컸던 마음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역마살이었다. 집을 철저히 '잠 자는 곳'으로만 이용하던 이십대의 나. 통금으로부터의 해방을! 새로운 만남을!! 자유를!!! 날마다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중국"이란 단어는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린 채... 그 넓은 중국 땅 어디를 가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낯선 곳을 간다는 설렘만으로 떠나게 되었다.
0원으로 + 10일동안 + 집떠남 + 낯선경험 = 오! 완젼 땡큐!
옌진공항에 내리자마자 얼굴을 바꾸라 그러질 않나.. (니가 뭔데!)
난생처음 버스안내양도 만나고..
웃기려고 그런건지 진지한건지 알길이 없는 간판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풍경은 매일 아침 6~7시? 정도면 펼쳐지는 동네 '장' 이었는데, 어떻게 그 새벽부터 튀기고 볶고 별의별 요리들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끔찍하게 죽어있는 개인지 나귀인지.. 차마 더 가까이는 못가겠는.. 저 아이들은 왜 저러고 있는지... 동네 장이라고 하기에 카테고리가 아주 풍성해 육해공군 식재료부터 푸드코트, 19금 좌판 등등등 안그래도 잘 시간인데.. 너무 현실같지가 않아 꿈꾸는 것 같았던 당시의 기분이 아직 손끝에 남아 만져진다.
서점이 있는 신식 건물에서 화장실을 가려했는데, 중국은 밀폐공간을 만들지 않아 화장실 칸막이가 반만.. 위가 뻥 뚫린 공공화장실을 보고는, 내가 있는 곳이 중국임을 다시금 깨달았던 것 같다.
처음엔 차도를 막무가내로 건너는 사람들 때문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아주 금방 적응해서 우리도 3차선이나 10차선이나 로컬피플처럼 당당하게 걷게 되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상큼해 보이는 과일을 사려는데 저울로 무게를 재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고 심장이 따뜻해졌다. 난로 앞에 앉아있는 것 같던 그 기분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다.
큰아빠가 연변과학기술대에서 만날 분이 있어서 따라갔는데, 가는 길 내내 비포장도로라.. 난생 처음 도로 포장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세상의 모든 캠퍼스는 작든 크든 낭만이 담겨있음을! 수수한 연변과기대지만 가득 채워진 젊음들을 보며 한껏 설렜다.
대망의 양뀀. 연변사람들은 양고기를 "양뀀"이라 불렀다.
하필 음식도전 면역력이 한참 낮았던 시기에 양고기를 처음 만나다니! 그것도 본고장에서! 오리지날의 맛은 나를 많이 내성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힘줄에.. 내장에.. 개구리에.. 가재에.. 곤충에... 온갖것을 다 꿰어 먹는 로컬피플들 ㅠ.ㅠ 집에서 먹고 식당에서도 먹고, 우리나라 돼지고기만큼 만만한 것이 연변의 양꼬치였지만.. 나와 양꼬치 사이는 그렇게 점점 더 멀어져 갔다.. (다행히 5년 후 서울 한복판에서 좋은 주선자 덕분에 양고기와 화해 ❤︎ 역삼동 그린양꼬치 추천!)
11년만에 다시 연변을 돌아보며 새롭게 알게된 사실이 하나 있는데, 사촌동생 팀과의 관계가 연변을 변곡점으로 달라졌다는 것이다. 워낙에 한 성격하는 인간들인데다 신경전 벌이기 딱 좋은 12월생과 빠른 2월생의 동갑내기라 우리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싸웠다. (생각만해도 징글징글.. 휴..) 그런데 2007년! 연변에 있던 2007년이 우리가 만나서 싸우지 않은 인생 첫 해였던 것이다.
우리는 왜 그동안 그렇게 지독하게 싸운걸까? 아마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였겠지? '나'를 방어하거나 드러내는 것이 내 존재를 지키는 것이라 여겼던 것 같다. 스물둘셋의 우리는 십대때와 다르게 나보다 남한테 시선을 돌리고 있었고, 나에게 익숙한 한국이나 팀에게 익숙한 미국이 아닌 우리 둘다에게 낯설고 낯선 연변 땅에서 전우애가 꽃피어 마침내 평화의 시대가 열린 게 아닐까.
연변을 다니는 내내 길거리에서 자주 만난 통키는 ㅠㅠ 볼때마다 왜이렇게 슬픈건지... ㅜㅜ 아아. 정말이지 이보다 더 슬플 수 없는.. 그런 눈.. 그렇게 연변을 더 깊숙이 눈에 담으며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고 있었다. 이상한 한국말도. 비슷하게 생긴 낯선 사람들도.
사실 우리는 백두산을 가기 위해 연변에 갔다.
드디어 백두산으로 향하던 날!
낡은 버스로 포장안된 도로를 달릴때면 너무나 괴로웠다.
덜컹덜컹. 얼마나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도가도 계속 가야했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다. 백두산으로 향하는 길 내내 한쪽은 북한, 한쪽은 중국이었는데. 기사님께서 북한쪽 저 언덕의 건물에 탈북하다 잡힌 사람들이 있다고... 북한 탈북자 수용소라고 알려주시자 우리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쌓였다.
북한 수용소를 바라보며 탈북한 사람들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티비나 뉴스기사로 접하는 소식과 차원이 다른 현실감을 선사했다. 우리가 지나가는 이 길을 누군가 목숨걸고 밟고자 했다니.. "탈북"이라는 거창하고 무시무시한 말이, 사실 이렇게 횡단보도 건너듯... 육교 하나 건너듯... 지척에 두고 있는 말일 줄이야. 중국과 북한은 소름돋도록 가깝다.
강은 또 생각보다 왜이렇게 좁은지... 가는 길 내내 북한이 코 앞에 있었다.
우린 결국 백두산에 오르지 못했다.
백두산은 날씨가 좋아야 오를 수 있어 아주 운이 좋아야 간다는 말을 충분히 들었던터라 실망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중국이나 연변이나 북한이나 백두산이나... 안중에도 없던 여행이었기 때문에 아무렴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 기대없는 여행은 선물로 그곳의 공기를 코끝에 남겨주었다. 백두산이 가까워질수록 어찌나 추운지! 우리나라도 겨울은 춥지만 7월의 스산한 추위를, 더구나 같은 하루 속에 북쪽으로 갈수록 점점점 추워지는 신기한 경험은 공기 그 자체로 기억에 새겨졌다. 와.. 북쪽의 추위란.. 얼마나 생경한 것인지...
백두산을 오르진 못했지만 북한과 가장 가까운 마을도 가고, 주민들도 만나고, 안중근의 흔적을 돌아보고 윤동주의 생가도 가볼 수 있었다. 북쪽에도 우리의 추억거리가 많았다. 아...! 우리가 우리라 그런가? 나는 점점 잦은 빈도로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우리가 왜, 이러고 살아야하지?
나는 어려서부터 일본에 대한 분노가 남달라 애국심이 넘쳤지만, (초등학교 땐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독립운동을 하고싶다고 울기도했다나.. ) 사실 통일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다. 되든지 말든지 일단 내시대는 아니었음 좋겠다는 걸로 입장정리도 끝난 상태였다.
눈 앞에서 북한과 북한 사람들을 보고도 내 입장은 극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날. 우연처럼 중국에 가면서 북한이 내 마음에 들어왔음은 분명하다. 그 날 이 후. 마일리지 적립이 시작된 것이다.
1포인트... 2포인트... 차곡차곡 북한에 대한 마일리지가 쌓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일리지를 다 채웠는지.. 뜻밖의 선물을 받았는데, 비행기를 타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을 진짜로 만난 날 이 후 내 삶에 "우연히" 라는 말은 영원히 퇴장하게 되었다. 아무리 사소한 일에서조차 '우연'이란 말을 도저히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전에 "우연히"라는 말을 썼다면 이제는 "우연처럼"이란 표현을 자주 쓰게 되었다. 내가 태어난 것도, 눈을 깜빡이는 것도 창조주의 계획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우연처럼 만났다
믿음을 선물로 받은 후 북한에 대한 마일리지는 더욱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다. 왜 하필 그때였을까. 왜 연변이었을까. 왜 큰엄마는 나에게 전화를 하신걸까. 왜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나. 수많은 왜를 던져봐도 더이상 "그냥" 이라고. "우연히" 그랬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저.. 나에게 맡겨졌다.
예수님의 사랑이 나에게 맡겨진 것처럼.
그래서 통일에 관심없던 나는, 마침내 말 할 수 있게 되었다.
왜 통일을 해야하나? 그냥 각자 살면 안될까? 중국이 있고, 일본이 있는 것 처럼. 북한이란 나라와 남한이란 나라가 평화롭게 있으면 충분한 거 아닐까?
통일을 하면 좋은 이유는 백개, 천개도 더 찾을 수 있지만.
통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우린 헤어진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어느날 갑자기.
어느날 갑자기 전쟁이 터졌고,
어느날 갑자기 내 가족만나러, 내 친구만나러, 내 고향땅에 갈 수 없게 되었다. 가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갈 방법이 도저히도저히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저렇게 가까운데! 망원경으로 보이는데! 강만 건너면 되는데! 저 산인데! 가지를 못한다니. 미칠노릇 아닌가?
헤어진지 65년.
미칠노릇인 채로 살기엔 참 버겁고 긴 시간이었지만,
같이 살았던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보면 충분히 다시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다.
북한과 대화를 해야하고, 통일을 위해 노력해야하는 이유는 그냥 가족이기 때문에. 이 하나로 충분하며, 끝까지 이 한가지를 구심점 삼아야 한다. 나처럼 북한에 두고온 가족이 없다고 먼나라이웃나라 보듯 공감하지 못한다면 옌진여행도 추천한다. 어쩜 우리랑 이렇게 비슷한 사람들이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지. 코앞에 살고 있는데 왜 가보질 못하는지. 문제를 아주 단순화해서 아이처럼 맑은 눈으로 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몇년전 올림픽에서 북한의 사격선수, 김성국 선수가 우리나라 진종오 선수에게 역전패를 당한 후 인터뷰를 했는데. 올림픽에 출전한 북한선수로는 처음으로 '통일'이란 단어를 입에 담았다고 한다.
나는 인터뷰를 보며 중간중간 그의 머뭇거림에 펑펑 울었다.
https://www.facebook.com/SBS8news/videos/1107142472693508/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다시 하나가 되는 일.
숨을 고르고
한글자 한글자를 꾹꾹 눌러
간절한 마음을 담는
그 일이, 나에게.
우리에게. 맡겨졌다.
내가 매일 기쁘게.
맡겨주신 일 행동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