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잔 마시러
헬싱키는 간절히 원하던 도시도 아니었고,
그곳에 머문 7일간의 시간은 그리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채워졌지만
하루이틀.. 7일을 지내며 나는 점점 더 선명히 느끼고 있었다.
머지않아 이곳에 또 오겠구나.
인천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는 그 길에 다짐했다. 단 3일의 휴가라도 이곳에 와 커피 한 잔 하고 돌아간다면 이 깊은 휴식을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이게 얼마나 가치있는 일이라는 걸 새파랗게 어린 나이에 알게 된 나는 또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그래, 언제든 부담없이 헬싱키로 오자.
머지않아의 시간이 어쩌다 2년 반이나 흘렀을까 싶지만, 최근 2년 반동안 나는 참 많이 달라졌다. 헬싱키의 공기를 마신 후 나는 마침내 30년간 함께 해 온 서울과 분당을 놓을 수 있었다. 그동안 끊임없는 양분으로 나를 만들어 준 아름다운 공간들에게 이제 그만 안녕을 고했다. 살고 싶은 곳을 찾아 2년간 전국을 돌아다녔고, 앞으로도 아주 열심히 찾아다닐 것이다.
헬싱키의 공기를 온몸으로 만지기 전엔 '공기가 좋다' 라는 것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나는 자연환경에 그리 예민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조류독감이 유행해도 대수롭지 않게 닭고기를 먹는.. 그런 부류의 사람. 당연히 공기 때문에 마스크를 끼고 거리를 활보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헬싱키의 공기가 내 몸에 문신처럼 남자 내 인생은 달라졌다. 생활의 편리나 영감 충만한 문화, 어린시절의 추억, 직장생활의 영위 같은 것들이 한 숨의 맑은 공기와는 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헬싱키를 가게 된 이유는 여럿있었지만 당연히 북유럽디자인 탓이 대부분이었다. '북유럽디자인 같은', '북유럽풍' 이란 말들에 진절머리가 나 대체 그것이 무엇인데 겨우 '풍' '같은' 것만으로도 왜 우리나라가 난리인지 직접 현장에서 알아채고 싶었다. 또 알바알토도 궁금하고... 여행의 가장 중요한 축을 '건축'으로 이어가는 흐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건의 현장에서 만난 헬싱키 디자인의 정체는 생활 속에 아주 친근하게 버무려있는 디자인이었다. 놀랍도록 특별하지 않음이 정말 대단히 좋다.
우리나라는 어떤 맥락으로 북유럽디자인을 좋다고 하는 것일까? 핀란드의 날씨, 그들이 중요하다 여기는 가치에 따라 맞춤옷처럼 꼭 맞춰진 그 옷을 왜 굳이 빌려 입으려고 하는걸까.
알바알토는 집 책상에 앉아 이 호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산책도 했겠지?!
아마 그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매일의 일상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알바알토의 손떼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작업실과 집, 동네를 어루만지며 사람도 공간도 자기가 가진 것과의 어울림이 커질수록 위대한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을 느꼈다.
한국의 북유럽은 화려하고 비싼 이미지지만, 북유럽의 북유럽은.. 특히 헬싱키는 참 소박하고 풋풋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옷도 딱히 잘입는 것도 아니고, 랜드마크가 우뚝 솟아 있는 것도 아니고, 이리저리 걸어다니면 그게 헬싱키 전부인 이 나라는 딱히 '유행'이란 것이 없다고 한다. 그때그때 인기있는 것은 있어도 '유행'이랄 것은 없는 문화. 이곳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시각의 유효기간이
얼마나 짧은지에 대해 자주 곱씹는다.
헬싱키에 있는 동안 수려하고 아름다운.. 수많은 것들을 눈에 담았지만 지금 내게 가장 생생히 남아있는 것은 코끝에 묻은 헬싱키의 공기이다.
다시 그 공기를 맡으며,
알바알토가 지은 아카데미아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실 뿐.
그 이외엔 아무런 계획이 없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미세먼지가 한가득 심했던 날, 나는 아주 충동적으로 헬싱키 재방송 티켓을 끊었다. 숨 쉴 구멍이 있어서 참 행복하면서도 어딘가 서글프기도 하다. 아직 살고싶은 곳에 살고있지 않기 때문일까?
코끝에 그 공기를 더 진하게 묻히고 돌아오면 그 힘으로 계속해서 살고 싶은 공간을 찾아야지. 곧 그곳에서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