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동네에 산다는 것
오랫동안 분당에서 살았다.
아파트의 삶은 정말 편리했다. 더구나 천당아래 분당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나 역시 평생동안 누려온 편리함이 좋았다. 서울 어디라도 갈 수 있는 교통편, 단지마다 있는 대형마트,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분당의 인지도. 분당에 살면서 불편함이라는 감정을 거의 느껴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 서울로 대학을 다니며 본격적으로 강북 곳곳을 다니게 되었다. 명동, 종로, 광화문 일대를 걷고 또 걸으며 강북의 매력에 겉잡을 수 없이 빠져버렸다.
지하철 3-4정거장 쯤은 산책하듯 걸어다녔는데, 그렇게 걸으면 걸을수록 분당이 점점 불편해졌다. 똑같은 패턴의 아파트 단지, 비슷한 모양의 건물과 거리. 분명 시간은 흐르고 있는데 지나가는 세월이 잘 느껴지지 않는.. 마냥 깔끔하기만 한 아파트 숲의 모습이, 어느 날부터인가 매우 건조하게 느껴졌다.
아 건조해
집에서 나와 버스정류장,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길도, 학원으로 빼곡한 건물도, 유명한 프랜차이즈 맛집이 가득한 로데오 거리도. 그동안 나에게 아무런 불편을 주지 않았던 것들로부터 나는 거대한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종로구 일대를 걷다보면 자주 불편함을 마주한다. 좁은 골목들은 여기저기 꼬여있고, 길은 그리 친절하지 않아 헤매기 쉽고, 언제나 천태만상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대신, 강북의 골목골목을 걷다보면 그 천태만상의 삶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특히 내가 사랑하는 서촌 일대는 조선 시대부터 문학인, 예술인이 많이 살았던 동네인만큼 매일매일 풍성한 영감이 쏟아졌다.
똑같이 생긴 101동 102동이 아니라, 문양이 특이했던 집 / 문 옆에 접시가 붙어있는 집 / 두번째 골목 맨 끝의 나무대문집 / ... 집집마다 다르게 생겼다. 저마다의 생김새처럼 이 집은 어떤 사람들이 살까? 저 집은? 하며 호기심을 자극하는 다양한 대문은 상상할 꺼리를 마구 던져준다.
신도시의 건물은 가게의 개성을 담기에 한계가 너무 컸다. 단지마다 거의 똑같은 건물의 모양새와 구조에서부터 기대라고는 되지 않았으니까. 비슷하게 생긴 상가건물 안엔 역시 비슷하게 생긴 슈퍼, 미용실, 세탁소, 문방구, 병원, 약국, 그리고 수많은 학원, 학원, 학원이 있었다. 내가 서촌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큰 이유는 슈퍼도 같은 슈퍼가 없고, 가게마다 주인의 개성이 진하게 묻어있다는 점이었다. 촌스러운듯 정감가는 꽃집 이름도, 굴뚝에 새겨진 목욕탕 이름도 한번씩 더 눈에 머무르게 만들었다. 아주 깔끔하고 예쁘장한 대문의 약국이 있는가 하면, 약국인지 미술관인지 모르겠을 정도로 수집한 물건으로 가득한 약국도 있었다.
큰 마트를 가려면 서울역까지 나가야하기도 했고, 가까운 통인시장엔 없는 거 빼곤 다 있었기에 일주일에 한두번의 퇴근길은 통인시장에 들렸다. 통인시장 끝에 있는 유명한 동네 빵집도 들리고, 방금 튀긴 떡꼬치 하나를 들고 돌아오면 장보기의 완벽한 완성이었다. 매끄러운 길과 카트가 없는 불편함따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세탁소, 미용실, 이발소, 기타 교습소, 자전거 수리점, ... 생활과 맞닿아 있는 가게들이 이렇게나 다양했었나? 싶은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굳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아도 집으로 가는 길이면 자연스럽게 길가에 펼쳐진 가게들을 관찰할 수 있어서 좋았다.
자하문로 10길에 가면, 나에게 서촌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세군데의 공간이 나란히 붙어있다.
전시공간 [팩토리]
카페 [mk2]
(지금은 사라진) 중고책방 [가가린]
통의동집으로의 이사를 쉽게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자하문로 10길에 통의동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한번씩은 들리던 통의동 3단콤보를 침대에서 몸을 꺼내 몇걸음만 걸어가면 민날 수 있다니?! 그 기분은 대체 어떤걸까? 반드시 누려보고 싶었다.
연애하다 같이 살게 된 신혼부부처럼. 우리는 소꼽놀이하듯 더욱 애틋해졌다. 안 해봤으면 정말 큰일났을만큼 좋았다. 특히 토요일의 느즈막한 아침 mk2에서 커피를 마시던 순간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동네친구 GD를 늦은밤 편의점에서 만나 같이 컵라면 먹고 헛소리 좀 하다가 들어가는 기분이라면 설명이 될까? 아주 멋지고 힙한 공간이 나만의 편안한 사랑방 같았다.
새로운 단골집도 생겼다.
[플랜b]는 오랫동안 통의동을 지키고 있던 카페였다. 이제 서촌의 주민이 됐으니, 서촌의 오래된 카페도 한번쯤 가봐야겠단 사명감이 생겼다. 카페에 들어서며 순식간에 세상이 슬로우모드로 바뀐 것 같았다. 이렇게 오래 커피를 기다려본 적은 없었다. 아무리 핸드드립이라지만, 플랜비에서는 주문한 요리를 기다리듯 커피를 기다렸다. 그리고 딱 그만큼 탁월하게 맛있었다. 오랜 기다림의 끝에 한모금을 마시면, 음~ 오늘도 역시 맛있군. 얼마든지 천천히 하셔도 좋아요. 커피 장인같은 사장님을 속으로 열렬히 응원했다. 통의동집에서 7개월의 삶을 끝낸 후 오랜만에 다시 서촌을 갔을 때, 플랜비가 사라져 있었다. 그 자리엔 프랜차이즈 빵집이 들어서기 위해 공사 중이었다. 난 그 모습이 너무도 끔찍하여 한동안 서촌에 가지 않았다. 사장님은 어디서 시간을 천천히 만들고 계실까? 손님이 나 뿐인데도 주문 후 한참을 기다렸던 그 시간들이 꽤 자주 그립다.
통의동집에서 필운대로로 건너가 배화여대 방향의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면 드디어 [키오스크]가 나타났다. 3평은 될까 싶은 작은 공간에 사장님의 작업실인 키친과 4-5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알차게 들어있다. 통의동에 살면서 이곳을 자주 갈 수 있었던 것이 정말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좀 빠듯한 채 가거나 오가는 길이 더 수고스러웠다면 키오스크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기 어려웠을테니까! 키오스크에서는 과묵하고 멋있는 사장님이 해주시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프랜치토스트를 먹을 수 있다. 사람이 많은 날은 처음 본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토스트 하나와 커피 한잔을 뚝딱 해치웅 후 서둘러 나오고, 사람이 너무 많은 날은 그냥 돌아오기도 하고, 모처럼 사람이 없는 날은 앉아서 책도 읽고 사장님이 주신 서비스 케익도 먹으며 키오스크와 찐한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지금은 망원동으로 자리를 옮기고 더욱 유명해져 서촌시절같은 낭만은 찾기 어려워진 것 같지만, 맛은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프랜치토스트!
키오스크로 향하는 오르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지점에 [서촌단호박국수]가 생겼다. 단호박국수집이 생긴 후 나는 반드시 국수 한그릇을 먹고 키오스크로 향하는 공식을 만들어버렸다. 살아생전 경험한 적 없는, 아주 강렬한 정갈함이 단호박국수집 모든 메뉴에 있었다. 주문을 받고나서 단호박 반죽을 면 만드는 기계에 넣으시는데, 좁은 가게에 기계 소리가 퍼지면 설렘을 한껏 부추겼다. 오픈한지 얼마되지 않아 두번째 갔을 때는 전에 봤던 사장님은 안계시고 사장님의 어머님만 계셨는데, 아직 카드 계산이 안 되서 외상으로 먹고 나오기도 했다. 동네에 사니까 다음주에 다시 오겠다고... 조금도 싫은 내색없이 웃으며 그러라고 하신 할머니사장님의 모습이 기억 깊이 남아있다. 그 이후 나는 더욱 열심을 다해 단호박국수집을 갔고, 친구들에게 서촌투어를 해줄때면 항상 첫번째로 단호박국수집을 데리고 가서 언제나 기분 좋은 칭찬을 들었다.
시간이 날때마다 동네 산책을 다녔다. 필운대로, 자하문로를 중심으로 서촌 일대를 걷고 또 걸었다. 카페는 물론이고 펍, 편집샵, 여러 디자인 스튜디오, 소규모 공방까지 서촌 전체가 하나의 전시 공간처럼 느껴졌다. 서촌을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살아보니 파도파도 끊임없이 매력이 나왔다. 7개월동안 구석구석 걸으며 서촌의 정취를 더 풍성하고 깊이 새겼다.
통의동집에 살면서는 출퇴근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거리가 멀어진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오고 가는 거리마다 볼거리가 많아 자꾸 머뭇거려졌기 때문이다. 지하철 타러 경복궁역으로 가는 길에도 여러번 눈과 걸음을 사로잡히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계절의 변화가 가장 유혹적이었는데, 서촌에서 보낸 늦가을, 겨울, 봄. 3계절의 시간을 아주 생생히 겪을 수 있어서 좋았다.
추웠던 날이 풀리자 초록으로 마을이 싱그러워졌다. 신기한 점은 그냥 공공의 조경 뿐 아니라 이웃집 테라스나 자그마한 스튜디오까지 모든 공간이 봄의 전시장이 된다는 점이었다. 다양한 표현으로 다양한 접점에서 봄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출근길 집앞에 나와 고개를 들면, 금새 하늘과 산이 보이는 것도 참 소중했다. 사방 어디를 봐도 아파트인 것이 익숙한 나의 출퇴근길. 통의동집에서는 매일 아침 저 멀리 둘러쌓인 산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마음을 정화하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서촌의 겨울은 낭만적이었다. 경복궁 돌담에 비친 조명은 겨울을 한껏 포근하게 만들었다.
통의동집에 입주하고 처음으로 눈이 많이 오던 날. 커다란 삽자루를 사들고 퇴근하는 이웃의 모습을 보고 무척 놀라고나서야 내가 더이상 아파트에 살고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한번도 '내집앞 눈치우기'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는데, 서촌에 사는 동안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미리미리 눈 치울 걱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눈 한 번 치워본 적 없는 겨울이라니... 어쩌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서촌은 오랜 세월의 결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동시에 젊은 아티스트들이 영감을 받는 곳. 새로움과 익숙함이 끊임없이 뒤섞이는 곳이다. 이렇게 좋아하는 동네에서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훨씬 황홀하고 뜻깊은 경험이었다.
사랑해서 하는 결혼
앞으로 어디에 살든 동네와 나 사이에 이정도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삶을 누려야 겠다는 기준을 새겼다. 적당한 스펙으로 결혼할 때가 되어 하는 결혼이 아닌, 정말 사랑해서. 보고있어도 보고싶어서 함께 살게되는 결혼을 더욱 꿈꾸게 되었다. 어떤 집, 어떤 동네에 산다는 것은 그 공간과 나의 결혼이니까.
내가 또 좋아할만한 공간이 어디 숨어있을까? 계절의 변화가 생생히 느껴지고 저마다의 개성이 살아있는 가게를 품고 있는 마을을 좀 더 찾아다녀 보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