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 choses> by Georges Perec
몇 년동안 안입던 옷에서 꽁돈 발견한 것 같은 연휴였지만, 워낙 시간이 필요했던 상황이라 다른 계획은 세울 필요가 없었다. 세워서는 안됐다. 그래도... 이대로 보내기는 뭔가 아쉬웠다. 왠지. 뭔가. 괜히..
여행갈 때마다 꼭 책 한권씩 챙기는 습관이 있다. 운 좋게 재미를 느끼면 긴 비행 시간을 짧게 느끼게 해주니 좋고, 반대라면 쉽게 잠들게 해주니 참으로 실패가 없는 요물이다.
여행 중 낯선 말들 속에 문득 외로울 때면, 틈틈히 한글로 된 텍스트로 위로를 받을 수있는 건 덤이다. 무한도전을 보거나 컵라면 끓여먹는 게 아니더라도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그중에서도 책을 읽는 건 가장 은은한 방법이라 아주 자연스럽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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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휴에 비록 여행은 못 가더라도, 애써 참고 또 참고 있는 여행 대신.. 책 한권이라도 읽으면 눈꼽만큼의 상상이라도 채워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집어들었던 책 한권.
마침내 나온 한글판 펭귄북스를 처음 보고, 너무 반가워 사두었던 책을 드디어! 몇달만에! 꺼내들었다. (펭귄북스에 대해서는 커밍쑨*)
50년. 반백년도 더 지난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다보면 말투는 촌스럽고, 시대상황은 어떤 식으로든 너무 절박해서 이래저래 어색하기 마련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진리나 그 언저리의 생각들이 여전히도 관통된다는 것이 느껴질 때면 켜켜이 쌓인 세월이 감동으로 곱해진다.
<사물들> 역시 60년대의 이야기라 전반적인 느낌이 어색할 뿐 아니라 등장인물은 있지만 대화가 없어 신기하기까지 한 구성인데, 그 청춘의 삶이 지금 우리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은 묘한 동질감이 느껴질 때 참 뭉클했다.
첫 번째 문은 마룻바닥에 밝은색 양탄자가 깔린 침실로 나 있을 것이다. 커다란 영국식 침대가 방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오른편에는 창문 양옆으로 폭이 좁고 높은 두 단짜리 선반에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는 책 몇 권과 앨범, 카드, 작은 화분, 목걸이 같은 잡동사니가 놓여 있을 것이다. 왼편으로는 오래된 참나무 옷장, 나무와 동으로 만든 옷걸이 두 개가 세련된 줄무늬 회색 실크로 싼 낮은 안락의자와 화장대를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사물들>은 이렇게 끊임없는 묘사의 연속이다.
본격적으로 사회를 알아가는 20대의 감정과 시대상황이 줄거리지만, 동시에 묘사되는 모든 사물과 공간은 상상하는 재미를 곁들인다.
몰입을 일으키는 특별한 사건전개나 마음가는 캐릭터를 드러내진 않아도 부담없이 읽어내려갈 수 있는 책으로써 색다른 맛이 있다.
사람이나 사물, 둘러쌓여있는 모든 것. 공간감을 관찰하는 일은 매일같이 반복되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작가가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맛깔나게 표현하지 못하면 결국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페렉은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로 채워진 이 글에서, 최소한 질리지 않게 사물들 하나하나를 상상해가며 시공간을 채울 수 있게 해 주었다. 어느덧 익숙하고 무덤덤해진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호기심 역치를 높여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밑줄 그어놓은 좋았던 구절 중.
취향은 더 확실하고 균형 잡힌 방향으로 서서히 저리 잡혀 갔다. 욕망은 성숙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탐욕은 분노의 성격을 점차 벗었다.
작가의 페렉은 12년간에 걸쳐 관찰한 파리의 여러 공간에 대한 <장소들>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현실이 되지 못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