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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젊은데리야끼 May 25. 2023

일단은 한국을 떠나야겠어!

이만하면 됐다, 떠나자 아무도 없는 곳으로.

대단히 이룬 게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고등학교 때는  입시를 위해 스펙 쌓는 활동을 열심히 했고, 대학교에 들어와서는 또다시 1학년부터 일을 꾸준히 벌려왔다. 공부로 승부를 볼만큼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미리' 잘하자가 내 모토였다.


항상 어깨에 다음엔 뭘 해야 하지?라는 압박과 부담감을 이고 살아서일까. 어느 순간 모든 게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모 학생기구에서 회장직을 맡아도, 공모전에서 상을 받아도 그 무엇 하나 기쁘지 않았다. 작년의 나는 매일을 축 처진 어깨로 수업을 듣고, 과제를 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ㅇㅇ아 너 괜찮은 거 맞지?"라고 물을 정도였으니.


특히 학생기구 회장직은 1년 내내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는데, 전교생에 가까운 학생들을 대표해야 했고 그만큼 책임감 또한 큰 자리였다. 한 달에 한 번 예산안을 심의하는 회의에 참석하고, 학교의 중대한 결정이 있을 때면 총학생회장과 함께 목소리를 내야만 했다. 내가 학번이 낮아서일까, 아니면 경험이 없어서일까. 주변에선 신경도 안 썼겠지만 초반에는 꽤나 큰 견제와 무시를 당한다고 생각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그렇게 느낀 걸 수도 있지만)


그럴 만도 하다. 나는 학생정치 경험이 없었고, 회장직도 공석이 오래되면 이 학생기구를 없앤다기에 덜컥 선거에 입후보해 당선되었으니. 초짜 회장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그저 이 자리를 1년 잘 감당해 내는 것만으로도 중간은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기왕 회장이 된 김에 잘 해내고 싶었다. 내 밑에 있는 집행부에겐 최고의 공동체를 선물해주고 싶고, 대외적으로는 저 기구 일 잘하네 라는 칭찬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태생이 마음 여리게 태어난 나는 '독해야 살아남는'이 자리가 너무 어려웠다. 너무.


 학교에 들이받을 수 있는 깡, 내부의 반대에도 기꺼이 밀어붙일 수 있는 추진력 뭐 이런 게 회장직의 전부인데 나는 언제나 순응했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독하게 나가는 것 또한 곤욕이었다. 이런 물러터진 회장을 보고 내부에서도, 그리고 학생들도 꽤나 답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답답한 건 나였다. 18학점을 들으며, 회장직을 수행하고, 학회에 공모전까지 준비해야 했으니 스트레스는 날로만 쌓여갔다. 내 올해 계획 안에 이 직책을 맡는 건 없었기에 기존의 일들과 함께 이겨내야 하는 큰 과제였던 것이다.


그냥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데로. 길을 걸을 때면 얼굴만 아는 모 학생기구 대표님이 내게 인사를 했고, 어딜 가나 실수하지 않을까 조심해야 했다. 지난해의 나는 내 이름이 아닌 회장 ㅇㅇㅇ으로 살아왔다.


힘들다고 어디 말할 수도 없는 이 자리가 사무치게 외로웠고, 임기가 끝나면 이 학교에서 발을 떼고 싶었다. 다음 학기를 도저히 이곳에서 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군대, 취업, 인턴 등으로 휴학하는 친구들 사이 나는 '교환학생'을 선택했다.


일 년 중 1/4를 상담센터에 다니고, 뭉친 어깨로 도저히 일상생활이 힘들어 마사지까지 받았던 내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또다시 학교로 돌아올 순 없었다. 그럼 뭘 하지? 그래, 일단은 한국을 떠나야겠어. 아무도 없는 어딘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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