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소시지의 추억

by 보통사람

내 삶 기억의 단편들


얼마 전부터 최현숙작가님의 구술생애사 수업을 듣고 있다. 구술생애사란 어렵고 힘든 생활을 견뎌낸 소외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글로 작업해주는 일을 말한다. 나는 겪어보지 않은 생을 살아온 타인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공감하며 마음속의 이야기를 끌어내주는 행위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수업 횟수를 거듭할수록 마음속에 있던 내 이야기를 뭔가 글로 풀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솟아올랐다. 나는 바로 노트북을 꺼내, 내 삶의 기억 단편들을 하나하나 적어 나가고 있다.


누가 내 이야기를 듣고 싶겠냐만은.



01. 소시지의 추억


나는 축축한 맨몸을 하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간밤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 이불 속은 포근했다. 아무도 없는 집안은 너무 조용해서, 간혹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에 안심이 될 정도였지만 익숙한 듯 누워 있었다.


간밤에 쏟아진 비 때문에 학교 가는 길은 질퍽였다. 나는 물웅덩이에 발을 첨벙이는 게 재미있어서 신발이 젖도록 발 춤을 추었다. 발바닥이 웅덩이 물 표면에 닿는 느낌과 찰랑 소리가 좋아서 몇 번이고 계속. 잔잔한 수면위로 동그란 파문이 일며, 비춰진 얼굴이 흐려지는 모습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큰 트럭이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물 고인 찻길을 지나갔다. 그 바람에 나는 그대로 흙탕물벼락을 맞았다. 울음이 터질 법도 한데, 울음조차 체념한 듯 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이불 속에 누워 있은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결심한 듯 일어나 장롱에서 옷을 꺼내들었다. 언젠가 엄마가 사주신, 아니 누군가에게 얻어온 기다란 드레스였다. 피아노 콩쿨 대회에서나 입을법한, 치렁치렁한 하얀 광택이 나는 드레스를 꺼내 입고서 뿌연 장롱 거울에 비춰 보았다. 유난히 까무잡잡한 얼굴과 하얀 드레스는 마치 전쟁 통에 구호물품에서 꺼내 입은 미제 옷처럼 품위 없이 겉돌았다.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알았지만 흙탕물을 온 몸으로 맞았기에 이 옷을 입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고쳐 빗고 문밖을 나서는 동안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비온 뒤 햇살은 유난히 빛이 났다. 얼굴을 찡그리고 놀이터로 향했다. 모두 학교에 갈 시간,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미련 없이 뒤돌아 까치발로 뛰어갔다. 얼마나 뛰었을까? 플라타나스 가로수가 빽빽이 이어진 길이 나왔다. 엄마와 몇 번 걸었던 길이었다. 커다란 잎사귀 사이로 보석처럼 빛나는 햇살이 아름다웠다. 나는 더욱 들뜬 마음으로 뛰고 또 뛰었다.


“얘! 얘야!”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고 부르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빨갛고 파란 불빛이 빙글빙글 도는 오토바이가 눈에 들어왔다.

“네, 네?”

“이리 좀 와볼래?”

순찰중이던 순경이 아이를 불러세웠다.

“아까부터 저기서 니가 뛰어 오는 모습을 보니까 꼭 하얀 나비같더라”

“...”

“이름이 뭐야? 귀엽게 생겼네?”

손경은 내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참...”

작은 내 손을 자신의 바지 앞섶에 가져다 놓고 순경은 말을 이었다.

“널 보니까 아저씨 기분이 너무 좋은데.. 어때? 점점 커지지? 딱딱하고 큰 게 좋은 거야”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느낀 나는 손을 잡아 빼려 했지만 점점 조여 왔다.

“왜? 좋지 않니?”

“아...니.....요...”

가까스로 잡힌 손을 빼낸 후 한참을 내달렸다. 달리고 달려서 더 이상 파란 불빛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다시 들어온 집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원래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것처럼. 달라진 게 있다면 햇살이 들어오던 창가엔 살짝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식탁으로 향했다. 엄마가 차려놓고 간 점심. 반찬은 기름에 볶지도 않은 차가운 생 소시지와 찬밥이 전부였다. 허겁지겁 허기를 채운 후 다시금 이불을 찾았다. 간밤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 이불 속은 여전히 포근했다.


나는 그렇게 잠이 들었다.


그날 내가 학교를 빠진 채 하얀 드레스를 입지 않았다면, 그 일을 겪지 않았을테지.

마치 욕망에 이끌려 빨간 구두를 신고난 후 춤을 멈출 수 없는 벌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