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축구하다가 다쳤어?”
나의 부상에는 ‘또’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붙는 것 같다. 일 년에 깁스를 세 번씩은 하고, 이제는 ‘이 정도 부었으면 단순 염좌니까 2주는 쉬어야겠군’ 하면서 야매로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몸 관리도 실력의 일부라던데 그런 면에서는 나는 우리 팀 최악의 멤버로 뽑힐지도 모른다. 수술 및 재활에만 축구화 백 켤레 값을 썼고, 축구에 쿨타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두세 달에 한 번 꼴로 누군가의 발에 차여서, 나 혼자 발을 접질러서, 공 대신 땅을 차서와 같은 이유로 운동장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들을 축구판에서 흔히 목격하게 된다. 우리는 의료인들로부터, 가족들로부터, 친구들로부터, 또 자기자신으로부터, 여러 주변인들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필드로 나온다. 아니, 이건 어쩌면 ‘축구 함’ 상태를 조종당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각자 다른 사연으로 부상을 당한 이들은 잠깐 축구를 쉬었다가 회복할 기미가 보이면 하나둘씩 캐시템(잠스트의 무릎 보호대, 발목 보호대, 스포츠 테이핑 등)을 장착하고서 경기장에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 하니, 비축구인들이 던지곤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다. “나도 몰라.”
나는 속된 말로 ‘힘 축구’를 하는 사람이었다. 몸으로 하는 활동에서 활약을 하기 위해서는 힘만한 게 없었다. 아니, 애초에 가진 게 힘밖에 없었다. 작지 않은 키와 눈에 띄는 두툼한 등빨로 인해 팀에서도 피지컬은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았다. 이러한 피지컬이 도움이 될 때도 있었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축구 지능은 갖추지 못했다. 무식하게 달려드는 축구 지능이 현저히 낮은 덩치 큰 친구, 동의어로는 드리블 고수들의 간식이자 애피타이저, 그게 나였다. 공격을 할 때에는 무릎의 스윙을 이용할 줄 몰라 단순히 발목 힘으로만 공을 찼고, 뛸 때에는 허벅지 근육이나 발목 힘을 쓸 줄을 몰라서 무릎 힘으로만 달리기를 해 댔다. 그런 내게 부상은 필연이자 시간문제였다. 발목, 발가락, 무릎, 오금근까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뼈와 인대가 다쳤다고 했다. 병원에서 만나는 의사 선생님이나 회사에서 만나는 동료들은 “축구 안 하는 게 어떻냐”고 했지만 내게 단순 부상과 같은 신체적인 이슈는 축구를 그만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잠깐 쉬고 나면 신이 내린(?) 미친 회복력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무식한 ‘힘 축구’의 시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한창 팀 운동과 개인 레슨을 병행하며 축구 주가를 높이고 있던 때였다. 나는 팀에서 구력이 높은 편에 속했기 때문에 주전으로 활약을 했었고 나의 축구 실력에 근거 없는 자만심마저 차오른 상태였다. 그러나 그날의 경기는 어쩐지 예상과는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2022년 11월의 마지막 주 일요일. 우리 팀은 그날따라 유독 경기가 안 풀려 계속해서 점수를 내주고 있었다. 패스는 자꾸만 짤렸고, 공격 라인이 조금이라도 올라간다 치면 금세 공수 전환이 되어 수비에만 급급한 상태가 됐다. 심지어 나는 상대에게 깊은 태클을 당해 벤치로 밀려나게 되었고 분위기가 점점 다운되어 간다 느꼈다. 상대적으로 구력이 있는 내가 더 애써야 한다, 한 골이라도 만회해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올려야 한다는 괜한 책임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무릎에 보호대를 차고서 불편한 다리를 끌고 필드에 다시 올랐다. 그러나 통쾌한 역전극은 없었다. 마지막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기 3분 전, 최종 수비를 맡고 있던 내 눈에 상대편 공격수가 오른쪽으로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게 보였다. 그를 막기 위해 몸을 돌리려던 찰나에 무릎에서 뿌드득, 소리가 나면서 몸이 그대로 기울었다. 이게 내 몸에서 나는 소리가 맞는 걸까?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끝마치지 못하고 미친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아무리 숨을 고르려고 해 봐도 무릎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쏟아졌고 그런 내 반응에 팀원들이 뭔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는지 멀리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119에 전화를 걸어 출동 요청을 하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모든 게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고통은 생생한 현실이었다.
정확한 진단은 우측 전방십자인대의 완전 파열, 그리고 연골판 파열 의심. MRI를 찍고 주사기로 무릎에 가득 찬 피를 빼고, 수술할 병원을 고르기 위해 상담을 다녔다. 무릎 수술 및 재활의 정보를 공유하는 카페에 가입 인사를 남기는 날을 내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재건술은 보통 자가건(자신의 햄스트링 등의 근육을 일부 떼어 내 끊어진 십자인대에 붙이는 것) 혹은 타가건(기증받은 타인의 아킬레스건 등의 근육을 끊어진 십자인대에 붙이는 것) 중 의사 선생님의 집도 방식에 따라 선택하게 된다. 나의 경우 자가건과 타가건을 한 번에 하는 두 줄짜리 재건 방식을 택했다. 수술 전후로 MRI 촬영과 입원 비용, 재료비 등을 포함한 수술비까지 하면 약 오백만 원 정도 들 거라고 했다. 찢어진 인대만큼이나 찢어진 지갑의 아픔도 상당했다.
수술 날도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난다. 당시 소설 PD 일을 맡고 있어, 실시간 연재가 진행되던 터라 연재 날 원고가 넘어오면 바로 편집을 마치고 제작과 등록을 진행해야 했다. 다행히 원고가 오전에 넘어와서 바삐 편집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수술 시간이 변경돼 지금 당장 수술실로 가야 한다고 했다. 급히 작가님께 연락해 ‘저 수술 좀 하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수술실로 이송되었다.
수술대 위는 춥고 삭막했다. 몸을 동그랗게 말아 척추 마취를 하고 마취가 잘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리를 이리저리 비틀고 꼬집어 감각이 들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 나의 시야를 가리고 손을 묶었다. 이내 드릴 같은 것이 두두두두 소리를 내며 무릎 뼈에 구멍을 내는 듯 하체에 강한 진동이 느껴졌고, 망치 같은 걸로 탕탕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착각일 수 있다). 마취가 잘된 탓인지 생각보다 수술도 별거 없네, 라고 생각하고 웃으면서 병상으로 돌아와 작가님께 상황 설명을 드리고 무사히 연재도 마쳤다. 그리고 곧 ‘진짜’ 고통이 찾아왔다. 마취가 깬 것이다. 무통 주사를 아무리 눌러도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그건 마치 무릎에 매복 사랑니가 4개가 났는데 마취 없이 뽑는 듯한 느낌, 혹은 무릎으로 아이를 낳는 느낌과 비슷했다.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급습했다. 잠이 오지 않아서 새벽 내내 뜬 눈으로 네덜란드와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8강전을 봤다. 다행이었다. 내가 여전히 축구를 사랑한다는 것이… 경기를 보며 충전한 아드레날린은 통증을 어느 정도 경감시켜 주었다. 그러나 사흘간 씻지도 못하고, 화장실에 갈 때는 간병인의 도움이 필요했으며, CPM(관절 운동 보조 기구)을 받으며 무릎의 각도를 내는 연습을 계속해야 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걸 어떻게 앞으로 계속하지? 처음으로 두려움이 들었다. 이거 축구가 문제가 아닌데?
십자인대 파열은 단순히 축구를 못 하게 된 것뿐 아니라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2주간 병가를 내고 집에서 요양을 해야만 했고, 밖에서 밥이라도 먹을라 치면 계단이 없는 식당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의 나를 더욱 좌절에 빠뜨린 것은 신체적인 아픔보다 ‘할 수 없음’ 상태로부터 오는 무기력함이었다. 언젠가 낫겠지, 하는 기약 없는 기대와 초조함, 다른 팀원들이 신나게 운동을 하는 것을 보며 ‘그때 무리하지 말걸’ 하는 늦은 후회, 물렁물렁해진 허벅지 근육을 바라볼 때 마주하는 좌절감 같은 것은 처음 겪어 보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정말 축구를 사랑했던 것인지 그 상태로도 운동장에 나가는 것을 택했다. 보조기(무릎이 일정 각도 이상 구부러지는 것을 막아주는 각도를 보조하는 기구)의 각도를 90도로 걸어 놓고 목발을 짚고서 꾸역꾸역 운동장에 얼굴을 비췄다. 그즈음에는 대부분의 약속이 축구인들과의 만남이었기에 내가 참석할 수 없었던 경기 내용을 복기할 때면 부러움과 조바심이 났고, 나를 진심으로 위로해 주는 팀원들에게 고마운 한편 ‘내가 쉬는 사이에 나만 뒤처지면 어떡하지?’ 하는 미련한 질투 같은 것도 차오르곤 했다. ‘축구 싫어!’ ‘축구 하는 사람들 만나는 거 싫어!’ 일기에 써 놓고서 매일매일 운동장에 나가는 모순의 연속. 그러니 기분은 매일 오락가락했고, 훈련장에 나와서 사람들과 활짝 웃다가도 삼겹살 집에서는 죽상을 하고 앉아 있었다. 내 못난 마음에도 팀원들은 꾸준히 나의 건강과 기분을 살펴 주었다. “다리는 요즘 어때?” “얼른 다 나아서 같이 뛰자!”하는 말들이 고장난 내 마음을 돌봤다. 그래서 나는 ‘이놈의 축구’를 그만둘 수가 없었다. 얼른 나아서 같이 뛰고 싶었기 때문에. 나의 건강과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래서 공을 찰 수는 없었지만 출석은 더욱 집착스레 했다. 생각보다 눈으로 보는 축구 훈련에서 배우는 게 꽤 많아졌다. 그렇게 몸으로 하는 축구가 아니라 머리로 하는 축구가 시작됐다. 운동장 한 켠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우리 팀원들이 뛰는 모습을 지켜봤다. 팀 매치 영상이 올라와도 사실 내 활약상 위주로 영상을 시청해 왔고 골이라도 넣었다 치면 그 구간만 반복해서 보곤 했기에 사실 다른 팀원들이 어떻게 뛰는지, 어떤 성향인지도 사실은 잘 몰랐다. 단순히 이날은 누가 나에게 어시스트를 해줬구나, 누가 몇 골을 넣었구나 하는 골과 직결된 정보만 기억할 뿐이었다. 팀원들이 인사이드 패스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며, A는 오른발잡이인데도 왼발 힘이 좋구나 알게 되었고, 2:1 돌파 훈련을 할 때에는 B는 버티는 힘이 좋으니까 피보(최전방 공격수)로 뛰어도 좋겠다, 와 같이 팀원들의 피지컬과 성향에 대해 좀 더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친선 경기를 할 때에는 우리 팀의 문제점과 장점들이 더욱 눈에 띄었다. 내가 직접 경기를 뛸 때에는 긴장감과 도파민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부분들이 바깥에서는 더 잘 보였다. 픽소(최후방 수비수)가 이때에는 치고 나가야 가운데 공간이 열리고 아라(사이드에서 공격과 수비를 모두 맡는 포지션)와 포지션 체인지를 하면 되겠구나, 하는 변칙적인 움직임의 타이밍을 읽을 수 있었고, 골레이로의 잘 던진 공 하나가 열 패스 부럽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내가 다치지 않았으면 알 수 없었을 감사한 배움의 순간들이었다.
수술한 지 177일 만에 모두의 환대를 받으며 다시 운동장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장대비가 쏟아졌고, 허접한 패스가 난무했지만 팀원들은 상상 이상으로 나의 복귀를 반겨 줬다. 케이크에 초를 켜 주었고 다정한 장문의 편지를 건네줬다. 다시 필드에 올랐을 때 가장 벅찼던 순간은 폭신한 잔디를 밟았던 때가 아니라 응원해 주는 동료들의 목소리가 다시 내 귀를 울렸을 때였다. 사실, 우리를 운동장 위로 다시 서게 하는 것은 강한 다리가 아니라 그곳에서 뛰고 싶어하는 강력한 의지일 것이다. 운동장에서 울리는 동료의 ‘헤이!’ 하는 목소리와, 눈을 마주치면 발 밑에 도착하는 패스, 그리고 골망을 가르는 골 뒤에 이어지는 같은 옥타브의 포효 같은 것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상은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다행히도 다친 부위가 넓지 않아 경과가 좋았고, 안식 휴가를 내고 재활에 전념할 수 있었으며, 마음이 병들었을 때에는 나보다 더 나의 복귀를 응원해 주던 팀원들의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수술 및 재활비로 천만 원가량 지출을 했지만 금주로 인해 약 15kg 다이어트(누군가는 이것을 보고 십자인대 다이어트, ‘쥬비스’라 칭한다)를 했고, 힘으로 하는 피지컬 축구가 아니라 머리로 하는 축구의 재미와 함께 팀 플레이와 전술에 대한 이해를 얻어 오히려 전보다 기량이 더 좋아졌다.
그리고 얼마 전 무릎에 박힌 핀 제거 수술을 했다. 다시 오른 수술대는 전처럼 춥거나 두렵지 않았다. 한두 달가량 운동을 쉬어야 했지만 그런 건 이제는 나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리가 아프면 눈으로라도 팀원들이 뛰는 모습을 보고 배우면 되고 심지어 재활 기간도 매우 짧았으니까. 게다가 입원 기간 내내 팀원들이 찾아와 맛있는 밥을 사 주었고, 간병인으로 있던 엄마에게 팀원들의 소개도 시켜 주었다. 엄마, 나랑 같이 뛰는 사람들이야. 내가 이 사람들 때문에 집에 안 가는 거야.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인대가 아니라 꺾였어도 겸허히 받아들이는 마음 같다. 포기하지 않고 견디는 마음의 근원은 나를 기다려 주는 이들로부터 비롯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알게 되었다. 그러니 나는 천만 원이 아깝지 않다. 그대신 내 몸을 더 소중히 여기고, 그만큼 팀원들과 함께 뛰는 시간의 감사함을 깨달았다. 무릎에 스포츠 테이핑을 꼼꼼히 감고, 발에 꼭 맞는 풋살화를 신고 팀 유니폼을 입고 다 함께 잔디를 밟는다. 이제는 뛴다. 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