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내 라면을 바라보던 여자는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곤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뭐야? 이럴 거면 왜 물어본 건데. 묻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내겐 그럴 용기가 없었다. 잠깐 아른거리던 얼굴을 떨쳐내곤 식어가는 라면 국물을 들이켰다. 왠지 모를 찝찝함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기분이다. 테이블에 있던 음식을 비우니 어느 정도 배가 찼다. 마음 같아선 후식으로 바나나 우유나 하나 사 먹고 싶었지만 내게 그건 사치였다. 바나나 우유가 1800원이던가? 그 가격이면 컵라면 하나를 사 먹고도 남는다. 물에 바나나 첨가물 조금 섞은 음료 하나 사 먹으려고 그런 거금을 쓸 수는 없지. 쓰레기를 치우고 테이블을 정리한 나는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옆 유리창에 알바를 구한다는 공고가 적혀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전화번호라도 저장해 놓을까. 누가 보면 쓰레기장에서 주워왔냐고 물어볼 법한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를 적었다. 연락은 나중에. 지금은 배부른 이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산책이나 할까."
문득 그러고 싶어졌다. 에너지를 낭비하면 안 되니까 너무 오래 걷지는 말고. 도로를 따라 이동하다가 한적한 공원으로 들어갔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 어르신들이었다. 나도 언젠간 저렇게 늙겠지. 체감이 되지는 않는다. 늙을 때까지 살아있기는 할까 그런 생각이 앞섰다.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 당장 내일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운이 더럽게 없으면 당장 심장마비로 쓰러져 인생 하직할 수도 있다. 그런 걸 보면 인생은 참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죽을 텐데 열심히 살아서 뭐 할까. 물론 열심히 사는 사람을 비난하는 건 아니다. 각자 자기만의 주관적인 가치관이 존재하는 거니까. 나는 그냥 편하게 살고 싶다. 로또 1등 당첨돼서 빈둥거리는 삶. 정말 최고가 아닐까?
그 기분을 평생 알 수 없겠지. 800만 분의 일. 내가 그런 행운의 남자가 될 확률은 한없이 제로에 가까우니까. 생각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덧 공원 중간쯤에 도착해 있었다. 나무가 무성하고 풀들이 우거진 곳.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는 공간이다. 바위 걸터앉는 나는 바로 옆에 위치한 호수를 바라봤다. 좋네. 사람 하나 없고. 지저귀는 새소리가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었다. 스치는 바람이 뺨을 간지럽힌다. 우울할 땐 가끔 이렇게 나와 바람을 쐬곤 했다. 그러면 기분이 좀 나아지더라고. 편안함을 잠 깐 뿐이었다. 다시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돈을 벌긴 해야 되는데."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은 필연적이다. 없으면 굶어 죽는 인생이요, 그게 바로 지옥이다. 대출을 받아 삶을 연명해 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태생이 나약한 본성을 지녔다.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사는 건 내게 불가능한 일이다. 정장 입은 어깨 형님들이 독촉하면 내가 그 부담감을 견딜 수 있을까? 그럴 바엔 그냥 없는 대로 사는 게 낫지. 아. 이젠 진짜 바닥인데. 어디서 돈다발이라도 떨어지면 좋겠다.
그러다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뭐 잘못 먹었나? 엄청난 통증이다. 순식간에 눈앞이 노랗게 변하고 뱃속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긴급 상황이라며 사이렌을 울려댔다. 주먹을 움켜쥔 나는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리 천애 고아 우울증 환자라 해도 기본적인 도덕성은 지니고 있다. 길바닥에 실례를 저지를 순 없었다. 그건 사회적 죽음과 직행되는 행동이니까.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화장실이 있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발을 잡아끌었다. 화장실에 도착했다. 안에 사람은 없다. 관리를 안 했는지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젠장. 코가 아니라 입으로 숨을 쉬자 조금 나아졌다. 여긴 막혔고. 여긴 망가졌네. 마지막 칸은 괜찮아 보인다.
속을 비우니 천국이 따로 없다. 신이 내게 기회를 주신 걸까. 휴지도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무리하고 나오려는데 뭔가가 눈에 밟혔다. 저게 뭐지? 변기 뒤쪽에 꽤나 큰 부피의 가방이 놓여있었다. 먼지가 쌓이지 않은 걸 보면 놔둔 지 좀 된 거 같은데. 누가 모르고 놓고 간 건가? 나는 무심코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이런 미친."
그리곤 벌어지는 턱을 닫을 수 없었다. 돈이다. 신사임당이 그려진 지폐. 심지어 가방을 가득 채운 지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이게 다 얼마야. 뇌가 아득해진다. 돈다발 하나에 못해도 500만 원은 할 테니까. 대충 살펴봐도 금액의 숫자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뒤적거렸다. 돈 말고 다른 건 없었다. 위치 추적기라던가 메모 이런 것들. 그니까 이 가방엔 오로지 돈만 있는 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온갖 상상을 더 했지만 내 몸은 자연스럽게 지폐 개수를 세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가방에 들어있는 금액을 확인했다.
"20억."
대략 20억이 든 돈가방을 주워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