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의 향기를 맡다 -청주 고인쇄 박물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의 흔적을 찾아서

by 미리상상

아이들에게 느림의 미학, 우리 옛 것의 아름다움을 몸으로 느끼게 해주고픈 부모라면-혹은 스스로 그런 것들을 체득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충북 청주에 위치한 고인쇄 박물관을 한번쯤은 방문해 볼 것을 추천한다. 왜냐고?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백운화상초록불조 직지심체요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불똥 튀는 주조 과정까지 눈 앞에서 생생히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직지를 알기 쉽게 씹어 떠먹여주는 듯한 다양한 관련 유물들과 영상 자료들, 체험은 덤이다.


긴 연휴에 집에서만 보내면 서로 힘들어질 것이 분명한 두 아이들을 데리고 갈 곳을 찾다 발견한 곳이 바로 청주였다. 2년에 한 번 열린다는 청주 공예 비엔날레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아이들은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로 고인쇄 박물관을 꼽았다. 청주고인쇄박물관은 크게 박물관 본관과 근현대인쇄전시관, 금속활자전수교육관, 그리고 직지가 발견된 주변 터인 사적 제315호 흥덕사지로 이루어져 있다.

마침 도착할 때 즈음 금속활자 전수교육관 앞에서 직접 시연을 안내해주는 임인호 금속활자장을 입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손이 상처투성이인 장인은 만들기 쉬운 납보다, 어렵지만 안전한 청동을 사용하여 금속활자를 주조하는 데 자부심을 내비쳤다.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시연자가 가장 고운 갯벌 모래로 주조틀을 만들고 장인이 직접 청동을 녹여 직접 금속활자 틀에 붉은 청동물을 부어 주조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 합금인데 이를 1200도의 고온에서 녹여 포도 나무 가지 모양의 틀을 직접 만들고 그 속에 액체가 된 청동을 부어 식힌 뒤 한 글자 한 글자를 일일이 떼어 책을 만든다고 한다. 펄펄 끓는 붉은 청동물을 틀 속에 붓는 장면에서는 시연장을 둘러싼 아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마치 일출을 보는 것만 같은 진한 선홍색이다. 연기와 함께 식은 틀을 떼어내는 시연자의 손길 역시 야무지고 신속했다.

문득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을 직지의 저자와 내용이 궁금해진다. 직지의 저자는 1377년 고려시대에 인도의 고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백운화상으로 제자인 석찬과 달잠이 금속활자로 간행했다고 알려진다. 직지의 중심 주제는 '직지심체'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불도를 깨닫는 명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직지는 어떻게 세상에 알려졌을까? 유네스코가 1972년을 ‘세계 책의 해’로 정하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는 ‘동양의 보물, 책’이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외규장각 의궤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나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일하고 있던 박병선 사서는 전시회에 내놓을 한국 책을 찾다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직지) 한 권을 발견했다. 그녀는 이 책의 가치를 밝히기 위해 파리에서 열린 책의 역사 종합 전람회에 직지심체요절을 출품하여 직지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임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된다. 직지의 끝부분에는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이 책은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이나 빨라, 한국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직지를 만든 흥덕사의 위치는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었다. 1984년, 청주대학교의 한연구원이 청주시 운천동에서 절터를 발견했고 그해 10월 그 연구원은 청동 금구(쇠북) 조각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공사도구로 인해 훼손되기는 했지만 금구 옆면에는 ‘흥덕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조사 결과, 이곳이 바로 직지를 만든 흥덕사임이 확인됐다. 발굴 결과는 공개되어 많은 언론에 알려졌고, 정부는 흥덕사지를 국가 사적으로 지정했다. 마침내 2001년, 직지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렇게까지 한국의 유물을 세상에 알리기까지 백방으로 노력했으며 외규장각 의궤의 한국 반환까지 성공한 박병선 박사의 열정과 집념이 놀랍고 감동적이다. 그 열정의 근원을 한 자락이라도 닮고 싶어 이후 박물관에 전시된 그녀의 유물들을 한참이고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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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가까이 진행된 금속활자 주조 시연이 모두 끝나자 아이들이 직접 할 수 있는 체험이 눈에 들어온다. 전통 방식으로 직접 책을 제작하는 활동인데 아들과 함께 흥덕사지 터를 둘러볼 때 보았던 닥나무를 사용하고 있었다. 닥나무 펄프를 직접 녹이고 얇게 펴서 말려 종이를 만든 뒤 양각 활자에 종이를 문질러 찍어내고 구멍을 뚫어 엮는 책만들기 과정이 녹록치 않다. 언제 끝나냐고 투정을 부리다가도 직접 만든 책이 완성되자 두 손에 꼭 쥐고 해사하게 웃는 딸의 표정이 환하다.


"엄마, 여행와서 신나고 행복해."


언제 이런 말을 딸에게 들은 적이 있었던가. 박물관 관람 시간이 끝나자 못내 아쉬웠는지 근처 터에 새겨져 있는 큰 8자 위를 뛰놀며 깔깔깔 웃는 아들을 보니 연달아 뿌듯한 마음이 든다. 바쁜 일상에 치이다 이렇게 아이들을 바라보고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고 무언가를 함께 해내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표류하는 정보 세계에서 현실을 응축해 지식을 퍼뜨릴 수 있는 것은 활자만이 가진 힘이 아니겠는가, 활자와 책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며 아이들과 고려의 발자취를 더듬어 걸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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