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이 되려면

아무 때나 씨앗이 되는 건 아니야.. 기다림

by 상생

겨울이 지나고, 봄이 시작될 무렵이 되면

나는 화원에서 어린 바질 모종을 사 온다.

바질은 봄에 성장을 이루고, 여름까지 잎을 키우며 결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는다.


바질의 향은 기분을 좋게 만든다.

가끔 기분이 가라앉는 저녁에

바질 잎을 하나 따 손에서 조물조물 비비면

젖은 숲의 향과 풀의 향이 무거운 공기 속에 퍼지며 답답했던 가슴 한편을 비워주기도 한다.

그 시원한 향기를 좋아한다.

바로 딴 싱싱한 초록의 잎으로 빨간 토마토와 어우러지는 향긋한 샐러드를 만들 수 있는 것도 근사하고 , 키우는 것도 까탈스럽지 않으니 자연스레 여러 개의 화분을 키우게 되었다.


10센티 정도의 작은 모종으로 시작한 바질은

그 기운이 다할 때까지 잎을 무성히 내고,

긴 줄기를 뻗어 그 끝에 하얀 작은 꽃을 쪼르륵 피운다.


오랜 기간 바질을 키우다 보니 처음에 무심히 지나쳤던 흰 꽃에 자연스럽게 눈이 가게 되었고

혹시나 나도 씨앗을 거둘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씨앗을 받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씨앗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가 하얀 꽃 속을 헤집어 봤지만 속절없이 흰 꽃잎만 날릴 뿐 아무리 들여다봐도 씨앗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씨앗은 흰꽃이 완전히 떨어지고 꽃받이가 말라비틀어져 갈색이 되어야만

씨방 안에서 작고도 선명한 검은 씨앗으로 나타난다.


파삭해진 갈색의 꽃받침을 살살 비비면 익숙하면서도 짙은 흙향이 섞인 과 함께 아주 작지만 단단한 짙은 검은 씨앗이 떨어진다.

그 안에는 새로운 생명을 품을 힘이 보인다.


씨앗들은 단단한 껍질을 만들기 위해

꽃이 지고 열매가 다할 때까지 견디며

비로소 태어날 준비를 끝내나 보다. 섣부르게 자신을 내주지 않는다.


참 신기한 일이다.

우리는 갈색이 되기 전에, 예쁜 초록색 씨방에서,

하얀 꽃에서 씨앗을 찾는다.

익어가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덜 된 씨앗을 찾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금만 더 기다린다면 반짝반짝 빛나는 씨앗을 수확할 수 있음에도 겉모습에 속고 성급한 마음에 속아 진짜가 아닌 씨앗을 얻거나 포기하고 만다.


어쩌면 우리는 일상에서도 같은 실수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긴 시간 견디고 달려오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

그만 손을 놓아버리고,

눈앞의 수확을 놓쳐버리는 것.


내게도 오랜 시간 공을 들였지만 성공을 이루지 못한 일들이 많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조바심은 커지고 그토록 확신에 찼던 믿음도 흔들리게 되는 순간이 온다. 오래 달리기에서 끝이 보이는 순간 힘을 빼버린 것, 수능 시험에서 풀리지 않던 두 개의 수학문제, 간절히 원했지만 한 번의 실패 후 포기한 자격시험. 꼭 해내겠다고 매달리던 턱걸이 하나.

내가 끝까지 조금만 더 애썼자면 어땠을까?

힘을 빼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건 어렵지만 그 순간을 이겨 내고 나면 아쉬움은 없었을 것 같다.


씨앗 하나 만들어지는데 꽃이 피고 그 꽃이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우리가 염원하는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기다림과 노력이 필요할까.


초록의 줄기에서 마른 가지가 될 때까지
떨어지지 않고 버티면 빛나는 씨앗이 되듯이

우리가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정말 많은 시간과 인내,

그리고 정성이 필요하다는 걸 작은 화분을 통해 배운다.

내년에는

저 까만 보석 같은 씨앗으로 바질을 키워볼 참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씨앗에서 또 다른 생명으로 나아가는 걸 보려 한다.

세상의 씨앗들, 씨앗을 기다리고 거두려고 하는 우리 모두에게, 긴 기다림과 끈질김 뒤에 오게 될 기쁨이 꼭 함께 하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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