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안고 나를 놓쳤다
새벽 6시 10분.
보리가 내 얼굴을 툭 건드렸다.
억지로 눈을 떴다.
코코와 루루는 케이지 안에서 조용히 눈을 굴렸고
주홍이와 개콩이는 케이지 구석에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다.
아이 넷은 제각각 나를 불렀다.
“엄마, 체육복 어디있어?”
“엄마, 빨리 여기 사인해줘.”
“엄마, 이 문제 모르겠어.”
“엄마, 이 양말 말고 다른거 줘.”
오늘도 나를 부르는 소리는 많았지만
그중에 나를 위한 목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첫째는 말없이 인상을 찌푸렸고
둘째는 밥도 안 먹고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셋째는 문제집을 덮으며 소리쳤다.
“엄마, 이 문제 모르겠다고.”
그 말에 내 안에서 무언가가 툭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막내는 머리 묶기 싫다고 도망쳤고
나는 따라가 조용히 머리를 묶어줬다.
손끝은 익숙하게 움직였지만
마음은 점점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거울 앞에 섰다.
눈빛은 텅 비어 있었고
입꼬리는 애써 움직이지 않았다.
그건 사람이 아니라
그냥 시스템이었다.
아무 일 없는 척
하루를 시작하는 방식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
아이들이 도서관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선생님, 이거 연체됐어요?”
“이런 책 더 있어요?”
“선생님 이 책 다 읽었는데 재미있는거 뭐 없어요?”
나는 익숙하게 대답하고
책을 건네며 웃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멍했고
그 안에서 마음이 점점 작아지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북적이는 공간 한복판에서
나는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10시 반
아이들을 재우고
보리 밥을 주고
코코와 루루가 마실 물을 갈고
주홍이와 개콩이에게 밀웜을 줬다.
작은 생명들이 반응하는 걸 보며
나도 아주 잠깐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
오늘 하루
누구도 나를 안아주지 않았다.
나 조차도...
현관 앞에 섰다.
말없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밤길을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그냥, 벗어나고 싶었다.
누구도 나를 부르지 않는 공간으로
어느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사라지고 싶었다.
잠깐이라도
나 없이 흘러가는 세상 어딘가에 숨고 싶었다.
얼마나 걸었는지도 모른다.
아파트 단지를 지나
닫힌 슈퍼, 불 꺼진 정류장을 지나고
조용한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짠내가 바람에 섞여 들었다.
고개를 들었을 땐
어느새 바다가 눈앞에 와 있었다.
이 동네는 걷다 보면 늘 그렇게 바다로 이어졌다.
나는 방파제 가까이까지 걸어갔다.
가로등 불빛이 물 위에 퍼져 있었고
파도 소리가 잔잔하게 부서졌다.
그 자리가 보였다.
예전에도 처음 발령을 받고 혼자 울던 밤
나 혼자 앉아 있던 그 자리가
나는 조용히 그 자리에 앉았다.
바람이 스쳤고
조금은 젖은 공기가 피부에 와닿았다.
그때 가방 안에서 무언가 툭 떨어졌다.
명찰이었다.
첫 발령 날 받았던 그 조그맣고 낯익은 사각형
손끝이 닿는 순간, 세상이 조용히 흔들렸다.
햇살이 맑았다.
낯설고 따뜻했다.
무릎까지 오는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맨얼굴의 내가 창가에 앉아 있었다.
가방 안에는
신규 발령 첫날 받았던 명찰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스물다섯의 내가
처음 도서관 문을 열었던 날처럼
숨을 죽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