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살의 나에게로

다시 나를 마주한 자리

by 주소영

세상이 조용히 흔들렸다.

햇살이 맑았다.

바람은 천천히 살을 스쳤고

내 귓가엔 책장이 바스락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떴다.


익숙한 냄새였다.

종이 냄새

책등에 고여 있던 햇살이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숨을 한번 들이켰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여긴 도서관이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내가 매일 출근하던 그 도서관이 아니었다.

공간은 거의 그대로인데

서가 배치는 조금 다르고

책상엔 지금보다 오래된 모니터가 놓여 있었다.


아이들 작품이 붙어 있어야 할 게시판은 텅 비어 있었고

북큐레이션 코너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 아닌 과거의 도서관

그 조용한 사실이 내 심장을 두드렸다.


몸을 일으켰다.

팔에 힘을 주자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늘 아프던 허리, 욱신거리던 어깨

그런 게 없었다.


그제야 나는 내 손등을 바라봤다.

얇고 부드러운 피부

작고 가벼운 손목

스물다섯 살의 내 손이었다.


창가 쪽

햇빛이 환하게 스며드는 자리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맨얼굴에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애는 나였다.

내가 나를 보고 있었다.


숨을 삼켰다.

심장이 울컥했다.

감정이 차오르는데

이해는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책장 사이를 걸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

아무도 부르지 않는 이름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대출반납 데스크 위엔

작은 포스트잇 한 장이 붙어 있었다.

‘해야 할 일’이라는 네 글자

그 아래엔 흐릿하게 지워진 펜 자국들


메모를 쓰던 습관도

그 순간의 마음도

다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선생님’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따뜻했다.

스물다섯, 그때 나는

이 말을 얼마나 듣고 싶었었는지...


그 애는 여전히 앉아 있었다.

말이 없었다.

눈빛은 무거웠고

숨은 얇았다.

그날 첫 발령을 받고 울던 밤

그 표정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조용히 다가가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면

이 모든 게 사라질 것 같았다.


문득, 창밖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낯익은 종소리

아이들이 쉬는 시간마다 들리는

그 평범한 소리


그러나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문은 열리지 않았고

복도는 조용했다.


나는 깨달았다.

이곳은 지금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하루가 끝나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책상 옆에 조용히 놓여 있던 명찰 하나

투명 케이스 안에

흐릿하게 적힌 이름


그 애가 손끝으로 그것을 내게 밀어주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는 순간

마치 숨을 되돌리는 듯한 낯선 감각이 스쳤다.


내가 스물다섯이었던 시절

처음으로 이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왔던 그날.

그날의 공기가

다시, 나를 감쌌다.


나는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이번엔 너부터 돌볼게.

책도, 아이도, 누구도 아닌 너 하나부터.”


조용한 도서관

빛이 길게 드리워진 오후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이 문을 열면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오늘 하루

스물다섯의 내가 걸었던 그 길을

나도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조용히

도서관 문을 열었다.



이전 02화오늘 나는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