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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성 Sep 05. 2022

내겐 너무 극단의 두 어머니!

‘두 어머니를 좀 섞어놓았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네!’ 


남편과 내가 종종 하는 말이다. 우리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에게서 너무도 큰 아쉬움이 느껴질 때 탄식하며 나오는 말이다. 이 나이에 키워주신 엄마 원망하려는 차원은 아니고, 그저 답답한 마음에 툭 하고 내뱉게 되는 것 같다. 그래도 남편은 당신의 답답한 어머니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평화롭게 지내는 편인데, 사실 나는 지금도 그게 잘 되는 편은 아니다. 부끄럽지만 내 인격의 아킬레스건이 엄마다. 지금도 엄마랑 살갑게 지내는 친구들을 보면 정말 그것처럼 부러운게 없다. ‘나도 엄마가 그렇게 살갑고 좋으면 정말 잘 할텐데...’ 하고 부족한 효심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나의 두 어머니는 정말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들이다.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싶다. 

조실부모한 탓에 초등학교도 채 졸업 못하고 큰오빠집에 얹혀살다 결혼, 가내수공업부터 시작해, 농사일, 가게일 마다하지 않고 뼈가 부스러져라 일해 우리 삼남매를 키운 억척 친정엄마에 비해 우리 시어머니는 일단 그 시절 희귀한 대졸 학력자이다. 사실 대학브랜드나 학과가 그닥 신통하지 않은 것을 보면 공부를 잘해서 보냈다기 보다는 그저 부유한 외동딸이라 대학에 보낸게 아닌가 싶다. 현재 83세인 시어머니는 교사였던 아버지의 무남독녀 외동딸로서, 가정부가 별도로 있었을 정도로 유복하게 성장한 공주님이다. 평생 김치 한번 담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살림에는 젬병인데, 결혼 후 세명의 자녀를 낳고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 몇 번의 작은 수술을 한 이후론 아예 당신의 남편이나 딸들의 봉양에 의지해 지금껏 살아오셨다. 모든 수발을 다 들어주던 시아버지님이 돌아가신 이후엔 큰딸네 가족과 같이 살고 있는데 딸이 엄마를 대하는 방식이 마치 애기 다루듯 하는 식이어서 사실 결혼 후 그 모습을 처음 봤을 때는 좀 놀라기도 했다.    

  

시어머니가 당신의 아버지 수준의 경제력 있는 남편을 만나 살았다면 그런 공주님 특성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텐데 안타깝게도 연애로 만나 결혼한 남편인 우리 시아버지는 일찍 직장에서도 짤리고 하는 일마다 안되서 일찌감치 실업자가 된데다 어머니는 무남독녀임에도 변변한 유산 상속조차 받지 못해 결국 가족은 일찌감치 빈궁한 삶으로 전락했다. 시어머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남자조카 중의 한명을 양자로 들였는데 그 양자에게 집이며 대부분의 유산이 상속됐다고 한다. 독실한 기독교집안에서 어찌 양자를 들였는지, 공주과의 연약한 딸을 가난한 집 장손에게 시집 보내놓고 어찌 이렇게 사후 대책도 없이 돌아가셨는지, 정말 태고적 일이지만 몹시도 안타까운 대목이다. 아무튼 평생을 공주로 살아야 적합했던 시어머니는 팔자에도 없을 것 같았던 생활 전선에도 뛰어들어 돈을 몇년 벌기도 하셨지만 결국 단단한 생활력을 확보하지 못한채 다섯식구가 단칸방을 전전하는 삶 속으로 일찌감치 들어갔다.      


남편은 중학교 시절부터 수업료가 없어서 담임 선생님이 대신 내주시거나 혹은 선생님이 반 친구들에게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모아서 내주곤 했다고 한다. 대학도 4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곳에 지원했는데 2년 장학금밖에 받지 못했고 그나마도 장학금 결정이 늦어져 일단 등록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는데 그 돈 역시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던 상황에서 동네 친구가 대신 내줘 가까스로 등록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 3때는 여동생 둘과 함께 다섯식구가 단칸방에서 살아야 했기에 도무지 공부를 할 여건이 안돼 교회에서 책상들을 붙이고 그 위에서 자면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남편과 연애한지 얼마 안됐을 때 이 얘기를 들었는데 몇십년전의 안쓰런 남편 모습이 그려져 순간 울컥해져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남편을 꼭 안아줬다. 나도 가난한 집 출신이지만 이토록 가난하게 자란 사람을 사실 티비 드라마 외에는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우리 집이 살만했던 거였구나’ 하고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지금도 공주과인 시어머니는 딸과 같이 살면서 아들의 경제적 뒷받침과 딸들의 수발에 의지해 살고 계신데 비해 친정 어머니는 집과 어느 정도 현금도 있고 자식들에게 다소의 생활비 보조는 받지만 혼자 잘 사신다. 언니와 내가 병원 동행이나 일상 지원을 종종 해주고는 있으나 평일엔 데이케어센터에 다니고 주말엔 자식들이 번갈아가며 방문해 같이 식사를 하는데, 자식들에 대한 고마움의 보답으로 지금도 종종 김치를 담아서 주신다.      


친정엄마는 귀도 멀어서 잘 안들리는데다 원래 대화 자체가 잘 되는 편이 아니기에 만나면 그저 일방통행식의 사오정 대화만 하다 간다. 반면 시어머니는 애교있는 서울말투로 교양 있고 센스있게 말을 잘 하신다. 내가 가끔 드라이브를 시켜드리거나 여행에 모시고 가면 ‘고맙다, 네 덕분에 행복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하신다. 친정엄마가 자식들에게 김치로 염치를 차리신다면 시어머니는 말로 보답하는 ‘말 염치’가 있으신 것이다.      


전화통화 예절에서도 두 분은 극단적인데, 우리 엄마는 본인이 하실 말이 있을 때 전화해서 일방적으로 말하고 내가 ‘알았어 주말에 가서 할게, 그리고 엄마....’ 하는 정도에서 전화가 툭 하고 꺼지는 식이다. 본인 하고 싶은 말 했고 듣고 싶은 말 들었으니 바로 끊으시는 것이다. 


반면 시어머니는 모든 대화가 끝나고 통화를 끝내야 하는 시점에서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애교있는 말투로 끝인사가 끝이 없다. 잘 지내라는 말을 여러 형태로 바꾸어 끝도 없이 하시는 통에 전화를 끊기가 어렵다. 처음엔 길고 긴 통화의 마무리를 견뎠지만 이젠 용건이 끝나면 바로 ‘어머니 그럼 저 전화 끊을께요’하고 끊는 식으로 결국 내가 얼른 마무리를 짓는다. 한마디로 전화통화가 일방적으로 빨리 끝나버리는 친정엄마와 너무 인사가 길어 내가 끊어야만 끝이 나는 시어머니와의 통화 사이에서 나도 가끔은 정상적인 중간 대화가 그립다.  

      

두분이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둘다 돈 버는 일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남자를 만나 평생 가난하게 사셨다는 점과 두분다 최근 치매 판정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 극단의 두분과 함께 앞으로 살아갈 날이 자못 궁금하다.     

 

이렇게 다른 두 어머니이기에 우리 부부는 두분을 좀 섞은 분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시어머니의 교양에 엄마의 독립적인 생활력이 겸비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아무튼 이렇게 극단의 두 어머니를 보면서 안타깝기도 하지만 한편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존중받지 못하고 산 것이 원망스럽긴 하지만 남편 정도의 혹독한 가난은 아닌 가정에서 자란 것이 감사하기도 하다. 나는 정말 내 가난이 학우들에게 도드라질 정도의 가난이었다면 아마 학교를 중퇴했을 것이다. 내 자의식이 그런 상황을 감내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차별로 인한 상처를 준 엄마지만 결혼 후 엄마가 많이 좋아졌다. 억척스럽게 우리 삼남매를 잘 키워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이렇게 극단의 두 어머니는 탄식과 감사가 교차하는 중년의 삶을 내게 주신다. 특히 생에 다소 교만해지려는 순간 생에 겸손해야 함을 가르쳐주신다. 할수 있는 데까진 잘 해드려야 할텐데 사실 가끔씩 시험에 들기도 한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다 내 마음에서 나온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새기고 또 새기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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