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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성 Jan 17. 2023

울 엄마는 내가 책임질 테니 여보는 여보 엄마 책임져요

중년에 결혼한 커플의 부모 돌봄에 대하여

“여보, 우리 엄마는 나와 언니가 알아서 책임질 테니 여보는 여보 엄마 잘 책임지면 돼요”


재작년 두 차례에 걸친 친정 엄마의 허리수술로 수발의 피로도가 꽤 컸던 내가 남편에게 비장하게 던진 말이다. 결혼한 지 몇 년 안돼 아직은 장모가 낯설을법한 남편은 주말부부로서 장모님 수발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물리적으로 적은 때문인지 뭔가 사위노릇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는듯해 내가 쐐기 박듯 한 말이다. 사실 나도 똑같이 전주에서 사는 탓에 일산에 사는 시어머니에게 효도할 물리적인 기회가 적다. 다행히 시어머니는 딸과 함께 살며 지극한 보살핌을 받고 있는터라 부담이 별로 없기도 하다.     


사실 나는 엄마와 전혀 살가운 사이가 아니라서 용건이 있을 때나 실제 해줘야 하는 일이 생길 때나 안부전화를 하는 사이이고, 모녀간에 애틋한 정서적 터치가 있는 대화는 평생 해본 적도 없다. 엄마가 그런 정서도 없거니와 언젠가부터 귀도 좀 멀어서 사실 전화 통화라고 해봐야 거의 내가 소리를 질러야 의사소통이 되는, 이른바 사오정 대화로 흐르기 때문에 사실 자주 통화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다고 엄마를 방임하는 것은 아니고 엄마를 챙길 일이 생각보다 꽤 많기에 일부러 전화하려고 하는 편은 아니라는 것이다.      


늦게 결혼을 하고 보니 남편도 생겼지만 남편과 함께 가족도 두 배가 되었다. 북한출신에 혈혈단신 살아오신 아버지 탓에 설날이면 세뱃돈 받을 데가 없어 늘 아쉬웠던 언니와 나는 어린 맘에 '이다음에 시집가면 대가족집으로 시집가야지' 했었다. 물론 이 말은 십여 년이 흐른 이후 실제로 대가족 집 맏며느리로 꿈을 이룬(?) 언니에 의해 '그다지 좋은 아이디어가 아님'이 실증된 이후 완전히 바뀌었지만 말이다.   


가장 큰 의지처이기도 하지만 때론 굴레가 되기도 하는 가족이 더 생겼다는 것은 귀한 인연에 감사도 하는 반면 부담의 의미로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나도 남편도...

     

인연이 된 지 몇 년 안 되는 아내의 엄마한테 잘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 감사해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진실로 남편에게 장모에 대한 부담을 결코 주고 싶지 않다. 자식이 없는 것도 아닌데 우리 엄마는 자신이 키운 자식들한테 돌봄을 받으면 되는 것이고, 그 자식들이 커버할 수 있는데 괜히 남편까지 동원하고 싶지는 않다. 사위는 사위이지 아들이 아니니까...      


결혼으로 가족이 됐으니 장모도 시어머니도 똑같이 어머니라고 누군가 질책할지 모르겠다. 나는 솔직해지고 싶다. 자연스럽게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가 아니면, 가족이라는 관계가 주는 연대성은 그 관계의 연대성이 힘을 발휘할만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축적돼야 가능하다고 본다.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손잡고 마주한 시간들이 쌓여야 비로소 가족적인 연대감이 생기는 것이지 남편의 가족이라고 해서 금세 컴퓨터 리셋하듯 마음 자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의식적으로 강박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은 할 수 있겠으나 사실 중년에 가정을 이룬 나 같은 경우는 꼭 그런 관습적 강박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사실 고개가 저어진다. 


내 엄마여도 돌봄은 힘든데... '소 귀에 경 읽기' 식의 답답한 생활방식의 고수로 인해 종종 효심을 시험에 들게 하는데... 그 힘듦을 늦게 만난 남편과 공유하고 싶지도 않고, 사실 반대의 경우도 그렇다. 대신 남편이 시어머니 봉양을 위해 얼마를 쓰건, 무엇을 하건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남편이 자신이 번 돈으로,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로 자신을 낳고 키워준 엄마에게 해준다는데 무슨 이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룰은 똑같이 내 어머니한테도 적용된다. 내 어머니를 위해 내가 얼마를 쓰건, 무엇을 하건 그것은 순전히 내 권한이다. 둘 다 각자 소득이 있으므로 그저 내가 번 돈, 나를 키우느라 애쓴 내 엄마한테 얼마를 쓰건 그것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리라.      


내가 이렇게 ‘각자 자기 엄마 알아서 봉양하기의 관점을 가지는 것은 나름 논리와 소신이 있어서다. 

먼저 노부모 돌봄 기간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지금도 여성 87세, 남성 81세가 평균 수명인데 실제는 대부분 그보다 훨씬 오래 사신다. 이젠 90세 이상을 사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그렇게 장수하는 분들이 병원이나 시설에서 전문적인 케어를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본인의 집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어 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자녀들의 수발 부담이 그만큼 길어질 수밖에 없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기간의 강요된(?) 효도를 해내야 하는 것은 자라면서 사랑을 극진하게 받은 효자여도 사실 힘들다. 내 부모여도 힘든 판국에 사위나 며느리는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특히 중년에 결혼한 커플의 경우 더욱 그럴 것이다. 행복하려고 늦게나마 결혼하고, 재혼도 했는데... 결혼하자마자 본인 부모 봉양에 배우자 부모 돌봄까지 떠맡아야 한다면 결혼의 로망은 점차 좋을 것 별반 없는 고달픈 현실로 변하기 쉬울 것이다. 어차피 둘이 함께 양쪽을 수발하면 마찬가지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어떻게 자기 어머니 수발드는 것과 장모, 시어머니 수발드는 게 같은 무게로 다가올 수 있을까? 내 어머니니까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나마 스트레스가 적은 것이지 다른 사람의 수발은 그게 직업이 아니고서야 쉽지 않다고 본다. 대안이 전혀 없다면야 모를까...


 ‘궂은일도 기쁜 일도 같이 해야 가족’이라는 말은 굳이 모든 궂은일을 같이 해야 가족의 자격이 된다는 말로 확대 해석될 필요는 없다. 서로 배려하고 스트레스 안 받게 해 주는 게 중요하지 가족 테두리를 두르게 됐다고 꼭 돌봄 부담 연대에 편입시킬 필요는 없다.

      

그리고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도 이미 중년이라 우리 스스로를 알아서 돌봐야 견딜 수 있는 나이라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도 돌봐야 하는 나이에 양쪽 부모 봉양하느라 이리저리 허둥대야 한다면 사실 우리도 병나기 쉽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중년 나이까지도 달고 살아야 할까? 차라리 ‘미움받을 용기’를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물론 이 말이 시어머님, 장모님 일을 서로 모르쇠 하자는 예기는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기본적인 상식과 도리, 그리고 마음이 움직이는 만큼 할 것은 하되 전통적인 며느리 역할을 굳이 상기하며 허둥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흔히들 둘이 만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게 결혼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가 내 생활의 결핍을 채워줘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수발, 내가 필요한 돈을 배우자를 통해 조달하기 위해 결혼한다면 그 결혼의 결과는 자명하다. 내 결핍을 채우려고 하는 결혼이 아닌, 남은 생을 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만혼이든 재혼이든 해야 한다.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누군가와 가정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절실히 행복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리라. 그 행복을 위해 내 부모도, 자식도, 형제도 조금 더 지혜롭게 관계 설정을 하는 것이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는 것을 빨리 인정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노년으로 가는 길목에 선 중년, 관습에서 조금 홀가분해져 나에 집중하고 내가 누리는 행복에 집중하는데 이 귀한 시간을 써야 할 것이다. 시간은 유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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