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없는 세계
칠드런 오브 맨 (알폰소 쿠아론, 2006)은 출산이 18년째 멈춘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인간은 더 이상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고, 현상 유지를 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마저도 사회적 혼란으로 인하여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자연 재해나 전쟁과 같은 상황이 아닌, 신생아가 태어나지 않는 극단적인 상황을 통해 문명의 기저에 깔린 사회, 욕망, 도덕 등에 대해 담론을 펼친다.
미국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국가들이 붕괴되었고, 그나마 영국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모습마저 디스토피아적 강압을 통해 겨우 이어지는 수준일 뿐이었다. (서울은 물에 잠기고, 도쿄는 독가스 테러가 일어난...)
주인공 테오는 한 때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며 같은 소속인 줄리언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었다. 하지만 아이를 독감으로 잃고, 이혼하고, 이후 국가에 소속되어 돈을 좇는 일을 하며 하루 하루 희망을 잃고 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불법 이민자를 지지하는 피시당의 리더가 되어 나타나 그에게 한 소녀를 불법적으로 빼내달란 부탁을 한다. 이런 세계관에 맞춰, 국가, 이민자, 희생을 키워드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동시에 이를 받아 들일 때 주의할 점을 다루고자 한다.
영화속에선 다른 국가들은 붕괴했고, 오로지 영국만이 남아 있다며 영상을 틀며 프로파간다를 시전한다. 하지만 현실은 경찰과 군대를 동원한 엄격한 통제를 통한 현상 유지에 불과했다. 물론,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주인공 테오가 테러로 인해 죽을 뻔하기 때문에 단순히 영화 속 영국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무조건적인 악으로 치부할 순 없다. 그러나 공동체가 시민-비시민의 이분법으로 환원되는 순간, 차별과 학살이 합리화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분명 존재한다. 앞서 테러를 예시로 들었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공동체의 ‘의미’자체가 사라진 사회인 것이다. 아이가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사회에서 서로에 대한 돌봄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공동체의 상징이 사라지고, 만인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 사회는 더 이상 자율적인 도덕 체계를 기대하기 힘들어진다.
결국 디스토피아적 세계로의 이행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딱딱한 질서 유지가 아닌, 공동체가 여전히 ‘함께 살아야 할 이유’를 공유하는 감각을 곤두 세우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2010년도에나 대두하게 된 이민자 문제를 일찍 다루었단 점이다. 2015년 시리아 난민 사태, 지중해 이민자 참사, 브렉시트와 반이민 정서의 확산 등... 영화에서의 극단적인 모습이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서 비영국인 이민자들은 단지 시민권이 없는 사람이 아닌, 국가가 폭력을 가하는 것이 정당화 되는 존재로 그려진다. 물론 국가가 치안을 유지하고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가 이분법적인 사고로 사람들을 정신적 감금상태에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민자를 배척하자고 선전하는 것은, 해당 국가 공동체의 결속을 단단히 하는 도구로 훌륭하게 사용될 수 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정말로 건강한 공동체인지 스스로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무조건적으로 이민자에 대해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입장이 아니다. 양측 모두의 입장이 분명 존재하고, 긍정할만한 근거가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각종 부정의가 이루어지게 되고, 항상 더 큰 피해를 입는 것은 누구인지 깊게 고민해보게 된다.
영화의 핵심 서사는 키라라는 젊은 난민 여성이 18년만에 유일하게 임신한 사실이 밝혀지고, 주인공이 그녀를 ‘휴먼 프로젝트’로 인도하기 위해 동행하게 되는 여정이다. 앞서 소개한 테오는 아이를 잃고 희망 또한 저버리고 냉소적으로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인류 공통의 과제인 ‘돌봄’을 마주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며 자신의 모든 여정을 함께 마치게 될 인물임을 깨우치게 된다. 즉, 타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윤리적 행위자로 변모하게 된다. 하지만 타인의 생명임과 동시에 자신의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정말 많은 이들의 희생을 마주하게 된다. 테오의 절친한 친구, 키라를 돌보던 간호사 등...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자신을 희생한다. 윤리는 타자의 상처 가능성에 대한 감응 능력에서 출발한다.*
감응 능력을 갖춘 성인들, 그리고 마침내 테오의 피에타적인 숭고한 희생 끝에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공동체로의 회귀 가능성을 열게 된다.
*주디스 버틀러, 『전쟁에 반대한다는 것』, 2012
필자가 생각하기에 칠드런 오브 맨은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중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너무 폭 넓게 시사하는 것이 아닌, 핵심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방식을 채택하였으며 그 당시엔 상상하기 힘든 긴 롱테이크 등을 활용하여 생동감 넘치게 등장인물들과 상황에 몰입할 수있었다.
다만 주인공 서사만으로 세상을 재단하게 된다면, 필자가 자주 강조하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진다. 영화는 부정의를 당하는 자-소수자들에게 시선을 집중하였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소수자를 옹호하는 거 같으며, 그 가치가 중요하단 사실에 격하게 동의한다. 하지만 인간이란 매우 간사하기 때문에, 바로 앞 마당의 권익이 침해 받는다 싶으면 곧바로 부정의를 행하는 자로 변모하게 된다.
칠드런 오브 맨은 소수자, 타자, 희생자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이는 강력한 메시지를 내포하지만, 동시에 관객이 무비판적으로 '피해자의 입장'만을 고수하게 될 수도 있다. 실제 세계는 보다 복잡하며, 인간은 상황에 따라 갑작스럽게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평화를 구축하고자 한다면, 양 극단에 무엇이 있음을 인지하고, 어렴풋한 중간 지점 어딘가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알폰소 쿠아론, <칠드런 오브 맨>,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