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거인』 속에서 평화 찾기
2009년도에 첫 연재를 시작으로 2021년도에 종장을 찍은 만화인
『진격의 거인』은 애니화가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처음엔 벽 안의 조사병단의 처절한 싸움에 흥미를 가졌지만, 회차가 거듭될 수록 세세하게 짜여진 설정과 반전들이 유행을 넘어 트랜드를 만들었다.
필자도 처음엔 이 작품의 잔혹성과 액션에서 흥미를 느꼈으나, 끝난지 4년이 지나가는 이 작품이 여전히 매력적인 이유엔 여전히 논의할 수 있는 지점들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러가지 이야기가 가능하겠으나 이번 스테이지 1의 주제인 '세계 평화'라는 키워드에 맞춰 '평화'의 관점으로 이 작품을 돌아보고자 한다.
현재 지구촌은 전쟁과 혐오로 가득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가자 지구 사태, 난민과 이민자에 대한 혐오, 분열된 정치. 그런 오늘날의 세계에서 『진격의 거인』은 반복되는 혐오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분열과 혐오의 세계관 속 등장인물들이 평화를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힘든지를 보여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평화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진격의 거인』 속 인간은 거대한 세 겹의 성벽 안에서 인간을 잡아먹는 거인을 피하며 살아간다. 비록 바깥에 거인이 존재하긴 하지만, 농경 사회를 이루고 군대를 갖추며 제법 평화롭게 살아가는 인류를 보여주며 작품은 시작한다.
작품 초반, 엘런은 어릴 적부터 ‘밖의 세계’를 갈망하며 자라난다. 작품 초반부에 그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이때부터 작품 속 엘런은 바깥 세계를 궁금해하며, 진정한 평화를 찾아 나서는 인물로 묘사가 된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긴 세월을 평화에 안주한 사람들은 벽 바깥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랜 시간 거인이 벽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평화라 믿으며 안일하게 지내왔다. 하지만 월 마리아가 거인들에게 빼앗기고, 그제서야 무지의 상태로 지내며 평화를 누리는 것이 불가능함을 피로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를 트리거로 작품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따라서 작품의 중반부까지는 액션과 탄탄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월 마리아를 되찾고 벽 바깥의 진실을 찾는 것이 작품의 주를 이루게 된다.
이후 여러 사건을 겪은 후 사실 인류의 문명은 벽 바깥에도 존재함을 알게 된다. 아홉 거인이라는 특수한 힘을 지니고 세상을 지배했던 특정 인류의 후손들은 파라디 섬에 추방되어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가장 앞장서 이들을 탄압했던 것은 거인의 힘을 이용하는 마레인들이었다. 그렇기에 파라디섬의 인류와 그 바깥 세계의 인류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으며, 긴 세월의 억압은 증오의 연쇄로 이어졌다. 그들 모두에게 사연은 있었으나, 그 해결 방법은 항상 '폭력'이 수반되었다. 파라디섬의 인류들은 과거의 조상들이 폭력을 행했다는 것을 이유로 감금되고, 자유를 빼앗겼으며 바깥 세계에서 살아가는 일부 후손들 또한 '순혈 마레인' 우월주의 제도화 속에서 차별을 받았다. 그리고 바깥 세계의 대부분은 이 차별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 속에 타당한 이유는 이미 과거에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악은 괴물이 아니라, 사고하지 않는 일상의 평범한 존재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 『진격의 거인』은 바로 그 평범한 복종과 경계 짓기가 얼마나 쉽게 제노사이드와 국가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충격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진격의 거인』 후반부의 핵심은 주인공 엘런 예거의 시점 전환이다. 그는 더 이상 “자유를 위해 싸우는 소년”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전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엘런은 ‘땅울림’이라는 전대미문의 학살을 계획하고 실행하며, ‘벽 밖 세계’를 파괴함하여 피라디섬의 자유를 얻고자 한다. 그가 내세우는 명분은 단 하나다. 자유. 그러나 이 자유는 어떤 성격의 자유인가? 자기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타자의 생존권을 제거하는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어서 미셸 푸코는 이렇게 묻는다—“어떤 권력이 폭력을 정당화하는가?” 엘런은 스스로 파괴자가 되어 세계의 윤리를 재정의하려 든다. 이는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고자 함과 동시에 그 외의 것들을 배척하는 극단적 민족주의적 사고 혹은 전체주의적 사고로 보인다.
엘런의 선택을 단순한 악으로 치부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작품은 그러한 이분법을 끝내 거부한다. 이 모든 것의 전말은 결국 피라디섬과 비피라디섬 둘 중 하나가 멸망하는 것이 아닌, 당장의 민족 보호와 최소한의 친구들을 지키는 소극적 저항이었다. 『진격의 거인』은 이러한 질문들을 우리 앞에 던지며, 관객을 ‘옳고 그름’의 이분법에서 벗어나게 한다.
『진격의 거인』은 외부의 적을 제거하는 단순한 영웅 서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괴물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하는 데서 긴장을 형성한다. 엘런 예거는 이야기의 중후반 이후, 거인의 힘을 통해 인류를 지키던 수호자에서, 인류의 대부분을 죽인 학살자로 변하게 된다.
이 과정은 단순한 배신이나 급작스러운 전개가 아니라, 역겹의 시간 동안 고민한 끝에 찾은 폭력을 통한 평화라는 아이러니로 드러난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은 괴물이 아니라, 생각 없이 행위하는 일상 속 인간에게서 비롯된다”고 경고했다. 그렇기에 전 세계 인류의 80%를 밟아 죽이고자 했던 엘런의 선택을 긍정할 순 없지만, 작품 초반부부터 함께해온 그의 모습으로 하여금 단순한 학살자로 보기 힘들게 만든다.
필자는 그의 선택은 전체의 평화보단 개인적인 감정에 조금 더 치우쳐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아니면 너 둘 중 하나가 모두 말살이 되어야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평화를 찾으려고 노력했음에 더욱 안타까워 보인다.
『진격의 거인』은 작품은 액션물을 넘어서 자유, 그리고 평화의 불가능성과 가능성 사이를 탐색하는 정치·철학적 서사다. 초반부의 적이던 ‘거인’은 곧 아군이 되기도 하고, 인간은 다시 괴물이 되기도 한다. 작품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오히려 여러 선택지들 속에서, 언제나 도덕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해왔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진격의 거인은 ‘인류 vs. 거인’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선다. 결국, 평화와 자유란 외부의 적을 제거해야만 오는 것이 아닌, 어느 지점인지 알 수 없는 중간값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 올까말까한 애매한 무엇이지 않았을까.
엘런의 선택 이후 결국 미래의 파라디섬은 멸망하게 된다. 전 세계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그였지만 결국 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은 사선을 함께 넘은 동료들을 지키는 것 뿐이었다. 시조의 거인은 그 힘을 통하여 과거-현재-미래가 공종하는 듯한 힘을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고통속에 선택을 강요받은 에렌의 세상은 결정론적이었다. 그가 마지막에 미카사의 품 속에서 얻은 것은 자유였을지 궁금하다.
참고 문헌
김윤아•김태완, ‘프로이트의 구조적 관점을 통한 『진격의 거인』에 관한 연구’, 2024
김지웅•이현석, ‘니체의 허무주의가 재현된 애니메이션의 연출적 특성’ – <진격의 거인>을 중심
으로,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