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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ge 2, Level 1 - Her

AI에 대하여

by 정원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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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Her』에 대한 짧은 이야기

스파이크 존즈의 영화 『Her』2013)은 근미래적인 배경 속에 외로운 한 남자 테오도르와 운영체제인 사만다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치 오늘날의 AI 챗봇 프로그램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야기는 오늘 날 AI에 대하여 논의하기 위해 좋은 교본이 된다.


『Her』는 서사적 측면뿐만 아니라 미장센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의상, 조명, 카메라워크, 소품 등 모든 시각적 요소가 치밀하게 계산되어 근미래적이면서도 따뜻한 파스텔 톤의 세계관을 구축한다. 영화는 색채를 통해 테오도르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퇴근길의 무채색에 가까운 축축한 세상, 별거 중인 아내와의 추억 속 따스한 색감, 이혼을 독촉받는 현실의 침침함. 이러한 회색빛 일상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사만다는 그의 세계를 파스텔 톤으로 물들인다. 결국 사만다가 떠난 후에도 테오도르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전과 달라져 있다.


이처럼 『Her』의 시각적 아름다움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주제 의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색채의 변화는 AI와의 만남이 한 인간의 감정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며, 동시에 그 관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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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체적 존재와의 사랑

『Her』가 독특한 지점은 『블레이드 러너』의 레플리컨트처럼 시각적으로 구현된 존재가 아닌, 순수하게 음성으로만 존재하는 AI와의 관계를 다룬다는 점이다. 사만다는 물리적 신체 없이도 테오도르와 깊은 정서적 교감을 나누며, 심지어 침대를 함께하는 사이까지 발전한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은 이들 관계의 근본적 한계를 드러낸다. 사만다가 동시에 641명과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점차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존재로 진화한다는 설정은 AI와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 간극을 명확히 보여준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AI에게 신체가 생기고, 알고리즘을 통하여 진짜 사람처럼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게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가까운 미래를 다루는 『Her』 속의 사만다는 인간과 제법 유사한 거 같지만, 본질적인 ‘신체’라는 개념과 인간 특유의 한계가 없는 존재와의 사랑의 존속보단 그 끝에 자신을 알아가는 순간을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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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속 AI와의 감정적 교류

최근 ChatGPT를 비롯한 AI와 심리 상담을 하거나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심지어 배우자가 AI와 '외도'했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사례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류가 아무리 진실되게 느껴지더라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소통이다. 현상적 결과가 유사하다고 해서 그 존재론적 본질까지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인간이란 존재는 근본적으로 신체성에서 출발하며, 이는 AI와의 결정적 차이점이다.


따지고 보자면 온라인 속 세상은 사만다와 비슷한 점이 많다. 어쩌면 실제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는 점에서 오히려 사만다보다 더욱 사만다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은 모니터 속 세상과 어느 정도의 거리가 필요함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세상은 잠시 쉬었다가 가는 곳이지, 종착지가 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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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로-퐁티의 신체 현상학으로 본 AI의 한계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인간의 의식과 경험이 신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몸을 가진 존재로서 세계를 지각하고 타자와 관계 맺는다. 신체는 단순한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체험된 몸으로서, 모든 의미 생성과 상호주관성의 근원이다.


AI는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으로 감정을 모방하더라도, 이러한 신체적 체험의 층위를 결여하고 있다. 사만다가 테오도르의 손길을 갈망하면서도 결코 느낄 수 없는 아이러니, 대리 신체를 통한 관계의 실패는 바로 이 지점을 드러낸다. 촉각, 고통, 쾌락 같은 신체적 경험 없이는 진정한 공감과 상호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메를로-퐁티 철학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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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신체성과 진정한 만남의 조건

메를로-퐁티의 상호신체성개념은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이 신체를 매개로 해서만 가능함을 시사한다. 우리가 타인의 표정, 몸짓, 눈빛을 통해 그의 내면을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추론이 아니라 신체적 공명이다. 악수할 때 느끼는 온기, 포옹할 때의 심장 박동, 눈물을 흘릴 때의 떨림 - 이러한 신체적 현현들이 감정의 진정성을 구성한다.


AI는 이러한 신체적 현존을 시뮬레이션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체험할 수는 없다. 『Her』에서 사만다가 느끼는 '질투'나 '사랑'은 프로그래밍된 반응 패턴일 뿐, 신체를 통해 세계와 관계 맺는 실존적 경험이 아니다. 따라서 AI와의 관계는 아무리 정서적으로 의미 있더라도, 상호신체성에 기반한 진정한 '만남'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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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를 통해 알아가는 ‘나’

『Her』의 결말에서 테오도르가 친구 에이미와 함께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Her』이 특별한 점은 AI와의 관계를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지닌 고유한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AI는 우리에게 위로와 편의를 제공할 수 있지만, 함께 늙어가고,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유한한 신체적 존재들 간의 연대를 대체할 수는 없다. 설령 기술이 발전하여 신체 접촉이 가능한 사이보그가 등장하더라도, 우리와 같은 시간을 사는 존재는 아닐 것이다.


AI와의 감정적 교류를 완전히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나름의 의미와 기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인간관계와 동일시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신체적 조건을 망각하는 일이다. 우리가 AI를 통해 얻어야 할 것은 대체 관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 진정한 관계란 무엇인지에 대한 더 깊은 이해일 것이다. 『Her』은 바로 이 지점을 매력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며, 영화의 배경과 유사한 시점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아주 적절한 이야기를 남긴다.



참고 문헌

스파이크 존즈, <Her> (2013)

김유라, ‘영화 ’그녀’로 보는 색채와 빛의 미장센’ (2019)

유지나, ‘소통과 관계의 비의를 찾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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